ADVERTISEMENT

'사랑의 책' 佛 앙리 구고 엮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우리 선조들에게는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원초적인 순수함과 순진함이 있었다.

구전돼온 설화들을 볼 때, 우리의 사회가 문명화돼 갈수록 신은 더욱 추상화되고 흙과 어린 아이와 같은 육체에서 멀어지고, 사랑의 유희는 금지와 까다로운 기준과 죄의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앙리 구고가 '사랑의 책' 을 펴내며 서문에서 밝힌 말이다 (문학세계사刊) .후대에 만들어진 온갖 도덕과 규칙들에서 몇 발짝 옆으로 비켜나 태초에 세상이 생겨난, 다시 말해 세계의 '어린 시절' 로 돌아가면 문명에 때묻지 않은 순진무구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것. 책에는 이처럼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성과 사랑에 대한 세계의 민화.설화 60여편이 올라 있다.

평소 신화와 전설, 우화등을 통해 현대문명에 찌든 우리들에 따뜻한 인간애를 일깨워주었던 저자는 여기에서도 설화.민담이라는 가장 오래된 문학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구성하며 인간의 원초적 상상력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유럽.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아랍.중남미.북극등 우리에게 비교적 생소한 지역의 민담도 고루 소개했다는 점. 특히 아프리카쪽의 이야기가 풍부하다.

원래 사람은 하나의 몸과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천상의 즐거움을 만끽했으나 술에 취해 하늘에서 떨어져 둘로 갈라지며 서로를 그리워하는 괴로움에 빠졌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창조주가 사람들에 쾌락의 선물을 내렸으며, 아주 오랜 옛날의 여성들의 '표징' 은 마음대로 떼고 붙였으나 한 남편의 크고 단호한 목소리에 움찔해져 한 곳에 고정되고 말았다는 등 기발한 발상이 이채롭다.

한국의 민담 2편도 함께 소개돼 흥미를 더한다.

추위에 지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한 석가여래의 도움으로 짐승의 시체가 썩은 물로 갈증을 달랜 결과 득도 (得道) 의 길을 찾은 신라 고승 원효의 이야기는 철학적 성찰이 번뜩이고, 죽은 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내의 빈 베개 옆에서 눈물을 흘리다 결국 밤마다 아내의 혼령과 재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부부의 애틋한 정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티베트 설화 '금지된 사랑' 은 남매간의 그릇된 사랑으로 세상이 어지럽게 됐다고 꼬집는다.

남매의 애정현장을 목격한 정령 (精靈) 이 남매를 혼내기 위해 독수리.다람쥐.새앙쥐.호랑이를 사자 (使者) 로 보냈으나 이들은 눈을 감아달라는 남매의 음식공세에 넘어가 결국 이후에도 닭.옥수수.쌀단지.돼지를 찾아헤매는 고역에 시달리게 됐다고. 프랑스 민담 '어떻게 천국을 잃어버렸나' 는 구약성서 창세기 부분을 거꾸로 해석한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이 아니라, 즉 낙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몸에서 새로운 에덴동산을 찾게 됐다며 기독교 정통교리에 대담하게 도전한다.

이밖에 '남성' 하나로 한 나라의 군주에 오른 청년 (아랍) , 남자와 여자의 즐거움을 모두 경험한 테레시아스 (그리스) 등 인간의 보편적 욕망과 쾌락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일화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랑이야기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항상 일상의 자극제로 살아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재불 (在佛) 판화가 육근영씨가 번역하고 삽화도 그렸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