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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구치 아들 “엄마 얘기 듣고 싶다” 요청에 정부, 인도주의 관점서 김현희와 만남 주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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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씨와 일본인 납북 여성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이 11일 부산에서 만났다. 김씨는 20여 년 전 자신과 1년8개월 동안 합숙생활을 했던 다구치의 아들에게 “어머니는 꼭 살아 있다고 믿는다”며 “희망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일본 정부는 국제적 관심을 모은 이번 만남을 계기로 납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는 전략이다.

①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中)가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김현희씨(右)와 만나 포옹하고 있다. 다구치는 북한에 납치된 후 김씨와 함께 살며 김씨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이은혜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왼쪽은 다구치의 오빠 이즈카 시게오.②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범인으로 체포된 김씨가 김포공항에서 압송되는 모습.③1978년 북한에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의 모습. 당시 22세였다. 사진공동취재단, [중앙포토]


◆이은혜와 다구치=다구치는 1978년 6월 일본에서 실종됐다.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 의혹을 결정적으로 확인해 준 게 김씨의 진술이었다. 위조된 일본인 여권을 사용해 KAL기에 탑승했던 김씨는 수사과정에서 “이은혜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과 83년 3월까지 1년8개월 동안 초대소에서 합숙하며 일본어와 문화, 생활습관 등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에 주목한 일본 경찰당국은 수사관을 한국에 파견, 김씨에게 여러 장의 일본인 여성 사진을 보여줬다. 김씨는 다구치의 사진을 꼭 집어 “이 사람이 바로 이은혜”라고 진술했다. ‘이은혜=다구치’의 등식이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수사에 관여한 사람은 훗날 일본 경찰의 수뇌가 됐다.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13명을 납치했는데 그중 8명이 숨지고 5명이 살아 있다”고 밝혔다. 다구치는 사망자 명단에 들어있었다. 북한 당국의 설명으로는 다구치가 86년 교통사고로 숨진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구치가 생존해 있다고 본다. 김씨는 “북한을 떠나오던 87년에 이은혜가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여러 차례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날 만남에서도 다구치의 생존을 뒷받침해 주는 확실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일본 정부는 나카소네 히로후미 외상까지 직접 나서 김씨와 다구치 가족의 만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국에 협조 요청을 해왔다. 한국 정부는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협력했다. “한 살 때 헤어진 어머니(다구치)와 한동안 같이 생활했던 사람(김현희)으로부터 엄마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아들 고이치로의 간절한 바람이 이번 만남의 배경이었다. 다구치의 가족은 오래전부터 이 만남을 희망해 왔으나 대북 관계를 중시한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 만남의 배경에는 납치 문제에 관심을 고조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계산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익명을 요청한 일본 정부의 한 당국자는 “솔직히 새로운 증언이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며 “일본 정부가 납치 문제 해결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내외에 알리고 국제 여론을 고조시키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용한 만남에 그치지 않고 굳이 공개 기자회견을 주선한 사실에서도 이런 의도가 읽힌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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