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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가족 깨진 ‘재팬 드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14세 필리핀 여중생 노리코가 강제 출국되는 부모와 생이별을 하게 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도쿄 입국관리국은 9일 불법 체류자인 노리코의 아버지 카르데론 아랑(36)을 구류했다. 역시 불법 체류자인 어머니 사라(38)와 노리코에 대해서는 16일까지 임시 방면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노리코의 부모는 이때까지 딸만 일본에 남기고 필리핀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확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전원이 구류돼 필리핀으로 강제 추방된다.

이들 부부는 1992~93년 각각 다른 사람 이름의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해 95년 7월 딸을 낳고 이름도 일본식인 노리코로 지었다. 노리코는 밝게 자랐고 가족도 단란했다.

그러나 2006년 불법 체류가 발각돼 같은 해 11월 강제 퇴거 처분을 받으면서 이들의 ‘재팬드림’은 위기에 빠졌다. 이들은 처분 취소를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지난해 9월 패소했다.

이후 노리코의 학교 친구와 인권단체들이 이들의 생이별을 막으려고 애썼다. 일본 정부에 이들 가족의 체류를 허용해 줄 것을 촉구하는 탄원서에도 2만 명이 서명했다. 하지만 일본 법무성은 원칙을 내세우며 가족의 동반 체류 요구를 거절했다.

카르데론 아랑은 9일 “일본에서 낳고 기른 딸아이를 혼자 남겨 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고 밝힌 뒤 입국관리국에 출두했으나 전격적으로 구류됐다.

노리코의 어머니 사라는 “딸은 아직 중학교 1학년이어서 자기 몸을 지키고 혼자 생활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학교 친구들의 위로를 받으며 이날도 등교한 노리코는 몰려든 일본 취재진에게 “(아버지의 구류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일본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불법 체류의 예외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노리코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사실상 일본이 고향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혼자 남을 경우 체류를 특별히 인정해 주겠다는 게 입국관리소의 입장이다. 동정론과 비판이 들끓는 것은 노리코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든 당국의 조치 때문이다.

국제법 전문가인 가나가와(神奈川)대 아베 고기(阿部浩己) 교수는 “장기간 안정된 가족 생활을 해체하려면 이민법 위반을 능가하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며 “국제사회의 관례에 따라 (인도주의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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