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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글씨는 마음의 표현” 이광사 글씨엔 ‘실학’ 담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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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글씨 똑바로 써라.”

이 말은 연필을 잡기 시작한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물론 마음이 발라야 글씨 조형도 바름을 암시하는 우리의 뿌리 깊은 심성론적 글씨관을 대변하는 말이다. 하지만 자판 ‘두드림’이 일상화된 요즘 글씨 ‘쓰기’를 사람의 심성과 결부하는 이런 발언은 생소하기까지 하다. 문자 가치를 물량ㆍ속도ㆍ기능 위주의 정보전달 수단 쪽으로만 몰고 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런 경향은 더 가속될 위험성(?)이 있다. 여기에는 20세기 들어 ‘글은 말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는 서구 중심의 종속적 언어관도 한몫 거들고 있다.

하지만 글씨는 그 자체가 말(음성언어)의 개념 세계를 문자언어의 시각 형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소리글자인 한글만 해도 자모음은 천(天)ㆍ지(地)ㆍ인(人) 삼재와 발음기관을 본뜬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글자꼴에서 전형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뜻글자인 한자는 그 자체가 영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여기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사람과 도구·재료가 유기적으로 결부되면서 글씨는 그 자체가 기호가 되고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왔다.

특히 서구 캘리그래피와 달리 한자문화권의 서예는 칼과 돌, 붓과 종이라는 도구·재료의 변천에 따라 신화시대 갑골문·종정문 등의 전서를 시작으로 예서는 물론 해서와 행초서 등으로 시대마다 다양한 서체가 만들어졌다. 또한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임금의 어필(御筆), 선승들의 선필(禪筆), 문인사대부나 도학자(道學者) 글씨, 사자관(寫字官)의 글씨 등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왔다. 서예가 어느 조형예술보다 ‘사람’이자 ‘역사’임이 여기서 밝혀지는 것이다.

예컨대 16세기 조선의 글씨를 횡단면으로 잘라 보면 도학자 이황의 ‘퇴필(退筆)’, 산림처사 황기로의 ‘광초(狂草)’, 사자관 한호의 ‘석봉체(石峰體)’, 선조대왕의 ‘어필’, 서산대사의 ‘선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조선 중의 조선’이라는 목릉성세(穆陵盛世) 전후의 시대 서풍을 공유하면서도 조형이나 미학 정신경계까지 독자적으로 전개됐다.

미학적으로 퇴필의 엄정단아함과 황기로 광초의 자유분방함은 성리학과 노장사상만큼이나 뚜렷이 차이가 난다. 제왕의 국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선조 어필과 시비ㆍ생사ㆍ색공ㆍ유무의 경계를 ‘얽매임 없이’ 넘나드는 서산의 선필에서 역설적으로 삼엄한 선기(禪機)가 뚝뚝 묻어난다. 물론 이러한 독자성은 사람의 성정과 기질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글씨라는 명제를 실증한 것이다.

문예를 도덕의 발현으로 간주한 이황의 글씨관은 마음을 쓰는 심법(心法)과 글자를 쓰는 자법(字法)이 동일하다는 생각으로 표명되고 있다. 그의 언설을 빌리면 “글씨는 본래부터 심법의 표현이라 다만 점ㆍ획마다 순일(純一)함을 지녀라(字法從來心法餘 但令點皆存一)”고 주문한 것이나 “우연히 쓴 몇 줄의 글씨가 신변(神變)이 백출하니 어찌 훌륭한 덕이 문예의 말단에 드러난 게 아니겠으며, 만물 중 하늘이 낸 성인의 자질이 아니라면 어찌 또 이처럼 조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인식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글씨에는 이처럼 같은 시기의 다양함은 물론 서로 다른 시대상도 극명하게 표출돼 있다. 다 같은 조선 후기라도 이광사와 김정희의 필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문예부흥기로 지칭되는 18세기 조선 한가운데에서 활동한 이광사(1705∼77)의 필적에는 개인에 대한 도저한 자각이 녹아나 있다. 이 시기는 임란 이후 관념의 공허함과 경문일치(經文一致)의 딱딱하고 숨 막히는 성리학의 가르침에 대한 사회적인 반성이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일어날 때다.

예컨대 농암 김창협(1651~1708)이 시의 정도(正道)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시(眞詩)’, 즉 시인의 성정(性情)과 천기(天機·인간이 본래 타고난 천진한 마음)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에 있다고 보면서 “무릇 시란 무엇인가. 성령(性靈)에 근원을 두고 물상에 기탁하는 것이다”고 갈파한 것과 같다. 그림에서도 진경(眞景)이나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생활공간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던 때 이광사는 23년 유배라는 실존의 삶의 회한과 울분을 리드미컬한 초서의 필획으로 분출하고 승화해내고 있다. 그의 필적에서 진한 막걸리 맛과 남도의 육자배기 가락이 묻어남은 당연지사인 것이다.

이에 반해 한 세기 후에 활동한 김정희(1786∼1856)는 제주도 북청 유배의 실존을 필획으로 형상화해 냈다는 점은 같지만 이광사의 리듬과는 다분히 다른 구축적인 공간을 경영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1500여 년을 지배해 온 왕희지 중심 서예사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을 추사가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법 중심의 첩학(帖學)을 한예(漢隸)의 비학(碑學)과 혼융해낸 ‘추사체(秋史體)’는 다름아닌 추사 자신이란 점에서 본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추사의 성과는 고증학이라는 조선 후기 유학이 예술과 하나로 일치된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 캘리그래피와 달리 서예에서 시대에 따라 사람의 성정·기질이 글씨에 어떻게 같고도 다르게 녹아나 있는지를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았다. 필적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국시로 조선 500년을 이끈 중심 인물이다. 이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모토로 물러서서는 처사로 산림에 은거하여 수양과 학문에 몰두한 도학자이자 문인이고 나아가서는 국가·사회를 경영하는 관리였다.

그러나 나라가 전란을 당하였을 때는 절의정신으로 목숨을 던진 의사였고, 한가한 때를 틈타 산천을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물아일체의 경지를 노래한 풍류객이었다. 또한 선비들은 사리(私利)보다 공의를 우선으로 삼고 심성을 연마한 군자로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도학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남긴 글씨는 사람마다 다른 성정·기질의 드러냄임과 동시에 조선 선비의 도학 이상의 예술적 표출이자 그 자체가 선비정신의 현현인 것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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