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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여론이 공정 방송 잣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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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는 지금 여론정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정당은 선거공약과 원칙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여론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아파트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분양원가 비공개를 당론으로 내세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분양원가 공개 반대 의지를 강력하게 내세우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수도 이전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총선 당시의 충청권 득표 전략의 일환으로 행정수도이전 특별법을 합의처리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론을 좇아갈 수 없는 상황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래서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은 그 정책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반면에 여론의 향방과 정파적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는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정파적 이해는 뒤편에 숨긴 채 '국민의 뜻'을 앞세운다. 특히 신문이나 방송이 특정 정책을 지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보도해 준다면 어렵지 않게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다.

언론매체 또한 여론조사 결과의 보도에 적극적이다. 여론의 향방을 궁금해 하는 독자나 시청자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데 일부 방송사와 언론관련 단체들은 여론조사 결과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쟁점 사안에 대한 공정성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탄핵방송의 공정성에 관한 논쟁에서 보았듯이 여론조사를 통해 알려진 탄핵 찬반 비율이 30대 70이라면 이 분포에 맞춰 보도하는 것이 공정보도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쳐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찬성이 65%이고 반대가 28%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탄핵에 대한 찬반 여론과 비슷한 비율이다. 과연 지금의 방송이 의견지지도를 반영해 국민투표 찬성에 비중을 두어 보도하고 하는가? 국민은 일관성 없이 상황논리에 따라 공정성의 잣대를 바꾸는 방송보도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탄핵 및 수도 이전과 같은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방송은 찬반의견의 수와 찬반의견의 강도를 모두 고려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양적.질적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에 근거해 지배적 의견만이 선이며 그 반대 의견은 악이라고 보는 편 가르기식 보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옳다고 믿는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수용하지 않는 도식적 사고는 자유주의 언론철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특히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옳은 의견'이 무엇인지를 미리 결정해주기보다 시청자들이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풍부한 의견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의견지지도를 공정성의 잣대로 사용하자는 주장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다. 시시각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여론을 제대로 측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당일 발생한 사안에 대해 숙고하고 토론할 시간과 기회를 허용하지 않은 채 응답을 요구하는 여론조사는 응답자들의 즉각적인 느낌과 이미지만을 측정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느낌과 이미지를 생산하는 주요 매체가 바로 방송이란 사실이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의견지지도에 따라 보도하는 것이 공정한 방송보도라고 생각한다면 방송사 스스로가 준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균형보도에 관한 강령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지금 방송사가 채택하고 있는 강령은 "대립된 견해를 균형 있게 다루어야 한다"이다. 이를 "대립된 견해를 의견지지도에 맞추어 다루어야 한다"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해 빚어지는 혼란과 혼선은 방송사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여론정치와 마찬가지로 '여론방송'도 딜레마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윤영철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