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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세기를찾아서]32.파리 생 제르맹거리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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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파리 생 제르맹거리에서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샹젤리제 거리·몽파르나스 언덕·생 제르맹 거리의 카페 그리고 수많은 미술관과 건축물들 사이를 거니는 동안 참으로 귀에 익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곧 서구화의 과정이었고 우리가 받은 교육도 그랬던 만큼 우리는 예상외로 파리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파리의 명소와 그 예술적 분위기에 접하는 동안 나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에 심취하기보다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건축·미술·문학 등 흔히 우리가 예술적이라 부르는 대상에 관한 지금까지의 생각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집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理想國家)에서 시인을 추방할 것을 주장하여 예술이란 이름의 비현실(非現實)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는가 하면, 반대로 예술이야말로 현실의 결핍상태를 드러냄과 동시에 현실의 건너편을 가리키는 ‘평형(平衡)의 지혜’라 예찬되기도 합니다. 파리는 내게 매우 피곤한 도시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부딪쳐오는 너무 많은 예술작품은 예술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는 나에게는 하나하나가 긴장의 누적으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생 제르맹 거리의 노상카페에서 다리쉼을 하며 생각의 혼란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파리의 카페는 흔히 사상과 예술의 산실로서 파리의 명물입니다. 이곳 생 제르맹 거리만 하더라도 브라스리 리프·오 되 마고 등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비롯하여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이 사색의 공간으로 삼았던 유명한 카페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이 파리에 온 이유는 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파리가 갖고 있는 다양성과 관용을 이 도시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으로 칩니다. 파리 예술의 토양이 바로 이 다양성과 관용성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습니다. 다양성은 획일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유의 개념이며 관용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남겨주는 인간(人間)적 여유입니다. 최근의 경향 역시 특히 미술과 건축에서는 종래의 조화와 통일이라는 주제에서 탈피하여 단편화·개체화를 모색하는 일종의 해체주의적 시도에 열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견 포스트모더니즘과 궤를 같이하는 몰가치적 경향이라 비판되기도 하지만 도리어 상품으로서의 예술이나 상품미학이라는 거대자본의 물질주의가 벌이는 획일적 포섭을 거부하는 프랑스 고유의 대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기존의 관습과 관성을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힘써야 할 목적이나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예술은 개인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열어주는 해방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이야말로 예술의 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용과 다양성은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전제이며 예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해방이 어떠한 예술양식을 만들어내고 얼마만한 높이의 성취를 이룩하느냐 하는 평가는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어떠한 목적에도 애쓸 필요가 없다는 당신의 선언은 예술을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무기론(武器論)을 경계하는 뜻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예술이 당면의 목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예술의 자유로운 입지야말로 비록 그것이 허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건너편을 가리키는 예술 본연의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술적 창의는 효율·경제주의라는 완고한 무쇠 방에 갇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깨뜨리는 대항적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탈무기론(脫武器論)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예술화하고 사회를 예술화하는 미래적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해방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진부한 틀에서 해방하고 완고한 가치로부터 해방하는 과제입니다. 나는 파리의 패션이나 쇼윈도우의 디스플레이를 감히 예술이라 부르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에 소중히 전시되고 있는 명작들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우리를 어떤 미적 타성에 가두는 것이라면 이미 예술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많은 천재들이 태어난 프랑스의 19세기를 예술의 세기라 하는 까닭도 바로 이 19세기가 해방의 세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세교회의 후원과 보호속에 갇혀있던 예술혼이 해방되는 프랑스혁명의 세기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술관의 대명사인 루브르가 곧 혁명의 소산이었다는 사실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루브르미술관은 1793년 국민공회가 절대왕정의 화려를 극한 루브르궁전을 미술관으로 바꿈으로써 탄생되었습니다. 혁명은 그 사회의 모든 닫힌 공간을 열어주고 잠긴 목소리를 틔워주는 격변의 경험을 사회에 안겨줍니다. 이것이 파리를 예술과 사상의 도시로 태어나게 한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경제법칙과 제도에 의한 혁명이었음에 반하여 프랑스혁명은 정치이념이라는 인간적 적극의지의 실현과정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측면이 파리의 예술을 낳게 한 모태가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중심축이 프랑스로부터 뉴욕이나 밀라노로 옮겨갔다고 하지만 프랑스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의 물질주의적 현실관에 포위되지 않은 예술,특히 예술의 해방적 의미와 창조적 속성이 포기되지 않는 한 파리는 그 중심의 이동을 수긍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파리는 비단 예술에 대한 모색뿐만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수많은 담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과 회의는 그 바탕에 있어서 파리가 갖고 있는 예술혼의 발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깊이있는 관련을 추구하는 것이며,어떠한 미래와도 연결될 수 있는‘소통방향(疏通方向)’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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