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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보다 내 안의 끼 살려 대학 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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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건국대 사학과 새내기가 된 박은경(19·경기도 경화여고 졸)양은 3일 ‘한국 역사 속의 전쟁’ 강의를 들었다. 박양은 “ ‘수라상’의 ‘수라’가 몽고어로 ‘쌀’이라는 것을 처음 알고 역사 공부가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역사 전문가가 꿈인 박양은 10년 후 자신의 미래도 소개했다. “2019년 3월 5일 저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의궤·지도·실록·그림을 관리하고 있을 거예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던 ‘직지심체요절’ 복구작업을 하느라 점심도 걸렀어요.”

고교생 때 한국사능력인증시험 중 ‘2급’을 딴 박양은 건국대가 2009학년도에 처음 시행한 ‘자기추천전형’을 통해 합격했다. ‘자기추천전형’은 수능과 내신 점수는 낮지만 특정 분야의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높은 학생을 입학사정관들이 면접으로 뽑는 제도다. 박양은 “대학이 장래성을 보고 뽑아준 만큼 세계적인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건국대의 자기추천전형을 통해 입학한 새내기 15명이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 성적은 좋지 않지만 ‘끼’와 ‘잠재력’ ‘발전 가능성’이 높다며 자신을 뽑아 달라고 했던 학생들이다. 건국대는 지난달 20일 입학사정관 7명이 15명 학생의 멘토(후견인)가 돼주는 ‘미래 실현 협약식’을 했다. 입학사정관이 한두 명씩을 맡아 대학 4년은 물론 졸업·취업 이후까지 경력을 관리해주기 위해서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건국대가 처음이다.

박양의 멘토를 맡은 전경원(39) 입학사정관은 “경기도 광주에 사는 박양은 다산 정약용의 스승이자 『동사강목』의 저자 순암 안정복이 광주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내 논문을 쓰고 이를 시청에 건의해 순암의 묘지를 답사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역사 지식의 해박함과 열정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말했다. 건국대는 지난해 8월 1박2일 심층면접을 통해 학생들을 선발했다. 문흥안 입학처장은 “자기소개서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수사관처럼 학생들과 다섯 번 면접을 했다”고 설명했다. 심층면접 결과 1차에서 뽑혔던 학생 중 5분의 1인 15명만 합격했다.

천민제(대구 영남고 졸)군은 고교 2학년 때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습작 소설이 인기를 끌어 책으로까지 출판됐다. 선악의 경계가 없다는 철학적 소재로 쓴 글을 본 출판사가 책 출간을 권유해 5권짜리 소설 『리메이킹 라이프』를 냈다. ‘글솜씨’ 덕에 합격한 셈이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읽어주신 책이 상상력의 원천이 됐다”며 “희곡연구동아리·스토리텔링 동아리 등에 들어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문화정보학부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엽효선(서울 풍문여고 졸)양은 고2 때 MBC 라디오 ‘박정아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DJ 김기덕의 DMB 방송에 출연했다. 낭랑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음악을 소개하는 실력이 프로 뺨친다는 평을 받았다. 고1 때 한국방송아카데미 고교생 대상, 고3 때 전국 고교생 아나운서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 방송인이 되겠다는 포부다.

◆올해는 60명 뽑겠다=건국대는 7명의 입학사정관도 엄격히 선발했다. 학생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대부분 30대 초반의 젊은 층을 채용했다. 전경원(고전문학) 박사는 고교 교사 출신이다. 서울 양정고에서 3학년 국어 교사를 했다. 문성빈씨는 미국 하버드대를 거쳐 컬럼비아대에서 비교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문 입학처장은 “올해는 자기추천전형 학생을 60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입학사정관실장 양성관(교육학과) 교수는 “수능만 잘 본 나머지 3000명과 경쟁하면서 본래의 재능을 살리도록 돕겠다”며 “성적보다 잠재력과 열정이 강한 학생이 장기전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원진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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