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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회사에 임금협상 위임한 오종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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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종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은 울산고를 졸업한 뒤 중소기업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다 1983년 7월 현대엔진(90년 현대중공업과 합병)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87년 현대엔진 노조를 만들어 교육홍보부장을 맡았다. 그해 파업을 주도했고, 그 파업이 87년 전국을 파업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노동자 투쟁의 발화점이 됐다. 회사는 오 위원장을 해고했다. 이듬해 해고자 신분으로 현대엔진의 파업을 지원하다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나자마자(91년)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을 결성했다. 계열사의 파업을 독려하다 두 차례 더 구속됐다. 감옥에서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크레인 농성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오종쇄는 절대 복직시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회사에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99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노총 금속연맹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2003년 노사협상에 따라 현대중공업에 복직됐다. 해고된 지 15년 만이었다. 2000년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 방식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2003년 성공회대가 개설한 노조간부 대상 교육 프로그램에서 “현재의 노동운동은 조직폭력배보다 못하다”며 노동계를 비판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07년 현대중공업의 제17대 노조위원장이 됐다. 임기는 올해 10월까지다. [사진=현대중공업 제공]

인터뷰 내내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위원장은 조합원의 머슴이자, 가정에선 가장이고, 회사에선 사원이며, 이 나라 국민 아닙니까”라고 강조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아들(5)의 전화를 받을 땐 자상한 아버지가 됐고, 조합원의 격려 전화를 받을 땐 허리를 숙였다. 오 위원장의 책상 앞에 놓인 소파 중 상석은 항상 비워둔다. 조합원의 자리라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오 위원장은 “이런 인터뷰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날이 오겠지요”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임금 협상을 회사에 위임한 배경은 뭔가.

“현대중공업은 현재 창사 이래 가장 많은 일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미리 대비하자는 뜻이다. 구조조정 바람이 일 때 대처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투쟁을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항해 중인 배를 보자. 지금은 잔잔한 바다를 순조롭게 운항하고 있다. 그런데 심각한 폭풍우가 몰려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그런데도 피항(避航)하지 않으면 결국 난파하고 만다. 이럴 때는 좀 더디게 가더라도 모두가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

-교섭권은 법에 보장된 노조의 권리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자존심을 팽개쳤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노조의 자존심은 교섭권이라는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조합원을 위하고, 지키는 것이 자존심이다.”

-회사가 임금을 삭감할 수도 있을 텐데.

“위임할 땐 삭감까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한 사람의 직원도 회사에서 떠밀리듯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걸 원하는 거다.”

-23일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명할 때 조합원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으로 안다.

“나도 놀랐다. 싸늘하고 냉정한 기류가 흐를 줄 알았다. 그런데 얘기하는 중간 중간에 조합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쳐 줬다. 현장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조합원들이 이해해준 데 대해 정말 감사한다.”

-대체로 설명회가 열리면 설명회장에선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끝난 뒤 노조사무실로 항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맞는 말이다. 설명회 당일 숙직자가 ‘오늘 잠자기는 글렀다’고 했다. 항의전화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한 통의 항의 전화도 없었다. 현대중공업 노조 역사상 이런 일은 처음이다. 회사 주변 선술집조차 장사가 안 됐다고 하더라. 노조 행사가 있는 날이면 선술집에선 조합원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노조 집행부를 성토하느라 항상 북적댔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 위원장 스스로 두렵지 않았나.

“솔직히 두려웠다. 대의원 수련회(18일)가 끝난 뒤 아내(38·변호사)에게 전화해서 ‘반대하는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단단히 각오하라’고 했다. 예전에는 반대파가 가족까지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설명회에서 제시한 자료가 전문적 내용을 담고 있던데.

“노조도 공부해야 산다. 세계 경제 흐름을 읽지 못하면 조합원을 투쟁 일선에 세우게 된다. 그렇게 해서 조합원이나 회사가 잘못됐을 때 노조가 책임질 건가. 그래서는 조합원을 위한 노조라고 할 수 없다. 인터넷 시대다. 일반인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런 시대에 노조가 지식만으로 설득하려 들면 안 된다. 지혜로워야 한다. 리더십과 동료의식이 함께 필요하다.”

오 위원장은 해외 출장 갈 때 비행기 안이나 버스에서 경제학이나 철학 관련 책을 두 권 이상 읽는다고 한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진두지휘했다.

“지금은 현대중공업과 한 울타리지만 그 당시엔 현대엔진과 현대중공업이 나뉘어 있었다(90년 12월 합병). 현대엔진 노조는 현대그룹의 첫 노조였다. 출범하자마자 쟁의에 들어갔다. 처음엔 노조 상근자 인정이나 두발 자유화 같은 것이 이슈였다. 당시엔 노동자들의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징계하는 등 한국 기업에 군사 문화가 팽배했다. 이런 걸 완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임금 인상 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파업으로 갔다. 그래도 그때는 국민의 시선이 따뜻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박봉에, 장시간 노동을 하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을 국민이 감내해 줬다.”

-그렇다면 지금은 많이 달라졌나.

“어느 때부터인가 대중이나 국민은 온데간 데없고, 이념이 지배하는 노조가 됐다. 서로 권력 다툼을 하기 바쁘다. 지금 국민은 직장에서 안정되게 일하기를 바란다.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비정규직을 끌어안고, 서민을 위해 봉사하기를 바란다. 권력투쟁을 하면 이런 대중의 마음을 못 읽게 된다.”

-경기 불황으로 대기업 하청업체나 협력회사의 타격이 더 크다.

“협력사의 노동조건 개선은 민주노총 방식으론 안 된다. 그들은 오로지 투쟁을 통해 원청회사가 정규직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청 단가에 학자금을 반영하고, 임금인상분을 반영한다. 더디게 가더라도 이렇게 가면 원·하청 노동자 간 격차가 줄어들고, 그게 동일 노동·동일 임금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2003년 성공회대에서 노조 간부를 대상으로 강의할 때 지금 노조를 ‘조폭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현대중공업 노조의 사례를 보면 현장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노조 대의원 가운데 강경파는 한 명도 없다. 조합원이 뽑아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회사 탄압 핑계를 댄다. 90년 골리앗 투쟁을 전후해 노동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됐다. 민족해방(NL)이니, 민중민주(PD)니 하면서 이념적 분파주의로 흘렀다. 대중이 지도자를 따르는 이유는 지도자에 대한 존중 때문이지 사상이 아니다.”

-민주노총이 지금 성폭력 사건으로 시끄럽다.

“99년인가, 민주노총에 회계 부정이 터졌을 때 이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같은 계파끼리 왜 그러느냐’고 야단치더라. 사건이 터져도 계파끼리 감싸거나 제대로 개혁을 안 하면 도덕성 문제는 계속 터질 수밖에 없다.”

-오 위원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목한 소위 ‘절대 복직 불가 5인방’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강성 투쟁을 주도했었는데.

“나는 좌충우돌파다. 좌파나 우파를 떠나 맞으면 함께 가는 거다. 그래서인지 금속연맹 부위원장 때도 ‘전투적이지 않다’는 내부 비판에 시달렸다. 결정적으로 내가 지금의 노동운동 방식에 회의를 느낀 건 대구 달성공단에 있는 한국게이츠 분규(2000년) 때였다. 100일 동안 파업했는데, 이유가 이상했다. 임금 삭감 없이 2조 2교대 방식을 3조 3교대로 바꾸는 것을 반대했다. 바꾸면 노동시간이 주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설득해 일주일 만에 파업을 풀게 했다. 알고 보니 대구 지역 상급단체가 2조 2교대가 좋다고 교육했고, 이를 따른 것이다. 그건 파업을 위한 파업이었다. 노조의 힘은 그렇게 보여주는 게 아니다.”

-현대중공업 노조에 대해 어용이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파업하지 않으면 어용인가. 당연히 파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교만이다. 역설적으로 그 교만이 현대중공업 노조를 바꿔놨다. 2004년 민주노총이 현대중공업 노조를 제명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민주노총은 6000명의 지지자를 잃었다. 조합원을 버려놓고 어용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김기찬 기자

오종쇄는

오종쇄(48)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은 지난달 25일 노조 창립 이후 처음으로 회사에 임금 협상을 위임했다. 성과급 지급 여부도 회사에 맡겼다. 연례적으로 받아온 성과급을 못 받으면 연봉이 15%가량 깎인다. 지난달 23일에는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노조 지도부가 투쟁만 얘기하는 건 사기”라며 “노조도 이제는 경영을 얘기해야 한다”고 노조원들을 설득했다. 8000여 명의 조합원은 만장일치로 오 위원장의 뜻을 받아들였다. 오 위원장은 1987년 노조를 설립하고 노동자 대투쟁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대단한 결정을 했다”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4일 이 회사 경제위기 극복 결의대회에 참석해 노조와 회사를 격려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과 같은 큰 사업장 노조의 임금 교섭 위임은 올 노사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오 위원장은 “조합원을 위한다는 점에선 그때(87년)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노조가 조합원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변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오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위원장 집무실에서 두어 시간, 공장을 둘러보고, 식사를 하며 세 시간 동안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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