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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시인들 '삶의 깊이'되새기는 시 잇따라 발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하루 다르게 하늘이 높아지는 계절이다.

그 하얗게 푸른 하늘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시가 흐른다.

먼날의 아스라한 추억과 또 가야할 길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마음 속을 채우는 계절. 누구든지 시인의 마음으로 만드는 가을은 그만큼 시인들에게도 많은 시를 쓰게한다.

최근 출간된 문예지 가을호나 9월호에도 계절의 풍향계로서 가을을 느끼게 하는 시들이 눈에 많이 띈다.

"먼길을 누가 하염없이 가고 있었다.

길가 풀섶에서 찌 찌 찌 벌레가 울고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이사 가자, 키 큰 저 무지렁나무 그늘 아래로, 내 귀에는 왠지 그렇게만 들렸다.

" 원로시인 김춘수씨가 '문예중앙' 에 발표한 시 '책 (冊)' 에도 가을 황혼이 깔려 있다.

인생의 긴 행로, 해는 기울고 풀벌레는 울고 있다.

그 소리가 마치 '엄마야 누나야 이사 가자' 는 소리로 시인의 마음에는 들린다.

이제 도회와 지식과 정보의 삶을 떠나 '무지렁나무 그늘 아래' , 그 소박했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젠 내가 할 일은/내가 어머님에게서 받은 생명을/하나, 하나, 다시 어머님에게로/다 보내드리기 전에/내가 이 세상에서 겪었던 일들에게/작별의 인사를 하나 하나 하는 일이옵니다.

//……/그립던 것에겐 그립던 그만치/애타던 것에겐 애타던 그만치/고독했던 것에겐 고독했던 그만치/작별의 예절을 하나, 하나, 차리는 일이옵니다. "

같은 잡지에 발표한 시 '이젠 내가 할 일은' 에서 원로시인 조병화씨는 이 가을에 비장하면서도 아름답게 '작별의 인사' 를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었던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며 이제 어머니에게 돌아가겠다고 한다.

낙엽이 그 어머니인 대지로 돌아가듯. 때문에 떠남은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감이다.

나이 탓인가.

칠순을 훨씬 넘긴 두 원로시인의 시에는 가을 황혼녁의 분위기가 처연하게 들어 있다.

"생선장수 이모가 내다파는 바다/바다는 다 팔았고/도마 위에 비늘만 남아서/이모는 따로 할 일이 없는데/밤마다 새벽별은 이모를 깨우는데/청상과부 이모는 대답이 없다/이모가 다 팔아버린 바다/이 세상에 바다는 더이상 없다. "

'창작과비평' 에 실린 중진시인 김종해씨의 '이모' 전문이다.

여름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가을 바다는 썰렁하다.

해서 가을은 바다를 바다이게끔 한다.

그 가난한 바다에서 김씨는 유년의 바다를 떠 올린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생선장수 이모의 추억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추억의 실감도 사라진 노년의 길목이기에 김씨는 '이 세상에 바다는 더이상 없다' 고 한다.

"목숨 끊어질 정도로 절박했던/사랑도 아픔도 그리움도/숯불 아궁이의 숯불처럼/잠들고/서른 일곱에 이 세상 하직하겠다던/젊은 날의 고뇌도 갈등도/깊은 몸 속에 침잠되어/물이 되고/오늘은 그 물길 따라/그냥 떠내려 가고 있다.

/늘 올라가기만을 꾀하던 길에서/이젠 내려가는 법도 배워야겠다. "

춘천에 사는 중견여류시인 이영춘씨가 '문학과창작' 9월호에 발표한 시 '강촌연가' 전문이다.

얼음이 풀린 이른 봄부터 푸르게 빛나던 춘천의 강물에도 이제 가을 빛이 드는가 보다.

빛나던 계절의 사랑도 아픔도 '숯불처럼 잠들고' 스러진다고 했으니. 이런 가을강에서 이씨는 '이젠 내려가는 법도 배워야겠다' 고 한다.

"무덤에 누워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본다/먼 곳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높낮이가 없나/햇살에 반짝이는 물비늘만이 아득할 뿐/저기 어디쯤 내 초라한 생애도/애증의 물거품 튕기며 쫓기듯 어딘가로 흘러가리라//……//무덤에 누워 눈을 감는다/감은 눈 속으로/나를 다녀간 아, 그리운 얼굴들. "

젊은 시인 이재무씨가 '현대문학' 9월호에 발표한 시 '무덤에 누워' 이다.

흰 구름 몇 점 떠다니고 애기 들국화 갈바람에 하늘거리는 언덕 무덤에 누우니 세상살이의 애증은 어느덧 사라지고 마음 속 초라하게 쌓인 것들만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지금은 떠나 없는 '그리운 얼굴들' 을 가을은 되돌려주고 있다.

그 가을의 쓸쓸하고 여린 정서를 계절의 입구에서 시인들은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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