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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모금운동,수련회 통해 10년간 거사 준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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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20면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시작됐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3·1운동 직후부터 민족대표들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진실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일제 당국의 관심사는 3·1운동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1운동이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돼 타율적으로 일어났다고 사실을 왜곡했다. 일제는 한국민의 무지와 무능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일을 스스로 도모할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낙인 찍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심지어 3·1운동이 1917년 일어난 일본의 ‘쌀 소동(米騷動)’의 영향을 받은 단순 소요사건이라고 모독했다.

민족과 독립 3.1운동의 주역들

일부 실증주의 사학자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기술한다. 사회주의자는 3·1운동이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부산물이라고 인식한다. 3·1운동의 주역이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편 북한 정권은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평양에서 일으킨 독립운동이라고 날조했다.

3·1운동의 타율성 주장에 대한 반격도 일찌감치 제기됐다.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 초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3·1운동이 외부적인 환경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독립정신이 발동하여 일어난 운동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금번 독립운동은 2000만 민족의 두뇌에 고유한 독립성으로 발동됨이요 결코 세계의 신사조와 시대의 격감(激感)에 피동(被動)된 바 아니다.”

손병희(사진)는 기독교와 불교·학생들의 협력을 이끌어낸 3·1운동의 주역이다. 천도교는 당시 교인 수 300만 명을 자랑하던 최대의 종교였다. 독립선언서는 손병희 선생이 최남선에게 명하여 작성됐다. 전국에 배포된 독립선언문 2만1000부도 2월 26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손병희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론을 주장하기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1910년 8월 29일의 경술국치 한 달 20일 전인 7월 2일에 손병희 선생은 교도들에게 말했다. “나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몇 해 지나지 않아 그 능력을 시험하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만고에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만고에 없는 일’은 3·1운동을 의미했다.

선생은 1912년 4월부터 ‘연성수련회’를 개최했다. 연성(煉性)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 즉 한울님이 주신 천성(天性)을 연마하여 닦는 것을 의미했다. 연성수련회는 1912년 4월 15일부터 1915년까지 3년간에 걸쳐 일곱 차례 열렸다. 전국의 교구장 483명이 어김없이 연성수련회에 참가해 ‘만고에 없는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연성수련회와 병행해 천도교는 1912년 10월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일으키고 1914년에는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조직해 3·1운동을 준비했다.

손병희는 1918년 12월 1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대교당 기공식을 하고 이어 같은 달 6일 전체 교인들에게 49일 특별 기도회를 명했다. 이 기도회는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5일까지 계속되는 40일간의 행사로서 3·1운동 거사를 앞두고 전국 교인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사전 작업이었다.

1918년 10월 손 선생은 독립선언의 준비를 시작했다. 교회의 모든 일은 박인호에게 일임하고 일반 교인에게 105일간 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독립운동비를 장만하기 위해 어육과 연초를 끊고 매일 밤 자정에 짚신 한 켤레씩 삼도록 명하였다. 다음 해 1월 말일까지 모금한 금액이 무려 500만원에 이르렀다. 천도교는 이 자금을 3·1운동에 투입했다.

3·1운동은 물론 천도교가 단독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 아니다. 그러나 천도교인, 특히 손병희 선생의 의지가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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