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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피땀 알기에, 부동산보다 사람 보고 대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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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06면

서울 평화시장새마을금고 직원인 김창한(오른쪽)·문정미(여)씨가 청원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수납을 하고 있다. 김씨가 끄는 카트는 현금입출기처럼 입출금 기능을 갖췄다. 최정동 기자

대형 은행부터 작은 신협까지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던 외환위기 시절 새마을금고는 자력으로 살아남았다. 생존의 비결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대세와 관계없는 작은 금융회사라 시장의 눈길을 끌지 않았던 데다 금융감독원의 감독도 받지 않아 언론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 한푼 안 받은 새마을금고의 생존 비결

다시 모든 경제주체가 생존 답안을 찾는 불황이다. 새마을금고도 파편을 맞았다. 개별 금고의 여유자금과 상환준비금을 운용하는 연합회는 지난달 26일 총회에서 지난해 5000억원 넘는 적자를 냈다고 보고했다. 글로벌 위기로 유가증권 투자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마을금고 사람들은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번 위기도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들이 밝히는 특유의 생명력과 생존 비결을 들어 본다.

식구처럼 고객 형편을 파악
“외환위기 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500만원 한도로 보증 없이 10억원을 빌려줬다. 내심 5% 정도 손실이 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더라도 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10원의 손실도 안 생겼다. 사람들이 ‘금고에서 날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내가 꼭 갚아야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구 원대새마을금고 박정구 전 이사장의 말이다. 당시 20년 넘게 금고를 이끌어 온 그도 깜짝 놀랐다. 금고 대출 덕에 파산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단골 고객이 됐다. 박 전 이사장은 “고기가 물 없이 살 수 없듯 금고는 지역 주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은행권에서 ‘무모한 대출 결정’ 사례로 비난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금고계에서는 경영의 전설이 됐다. 이종욱 서울여대 교수는 “‘금고 돈을 떼먹는 것은 동네에 부끄러운 짓이니 꼭 갚아야 한다’고 유언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려 ‘금고에 사고를 치면 조상 묘를 파 떠나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신양철 전 연합회 본부장은 “가장 확실한 ‘인격 담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금고의 힘은 주민의 형편을 낱낱이 아는 데서 나온다. 은행원들은 한곳에 오래 근무하지 않지만 금고 직원은 한 지역에서만 일한다. 지역과 주민 사정을 속속 꿰뚫기 마련이다. 강릉 중부새마을금고 정호범 이사장은 “300개 시장 점포의 시세가 제각각인데 우리 직원은 그걸 다 안다”며 “임직원이 사심만 없다면 상환 능력이 있는지 70%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객과의 끈끈한 정이 금고 경영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정 이사장은 “이사장이나 실무자의 사심이 작용하지 않게 대출심의위원회에서 지혜를 모은다”고 말했다. 낯선 사람에겐 문턱을 높인다. 서산 서동새마을금고 김정한 이사장은 “사정을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이 와 대출해 달라고 하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직원도 손실 메워
1990년대 초 금고 경영을 자문했던 최범수 신한금융지주 부사장은 “감독과 교육이 강력히 시행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강조하는 새마을금고에 감독과 교육은 시련의 흔적이자 교훈이다. 새마을금고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까지 최대 위기를 맞는다. 오일 쇼크로 경기가 얼어붙자 전국에서 횡령과 부실 사고가 발생했다.

전두환 정부는 한때 금고를 해체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서민들이 은행보다 더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점이 부각돼 문 닫는 것을 가까스로 면했다. 대신 새마을금고법이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정부 감독을 받기 시작했다. 간판도 ‘마을금고’에서 ‘새마을금고’로 바꿔 달았다. 금고가 예금을 돌려주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전체 금고가 매년 결산금의 일부를 갹출해 연합회에 ‘예·적금 환급을 위한 안전기금’을 두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금자보호 제도다.

금고연합회장은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관 출신이 맡았다. 금융에 어두운 관료 출신들은 규제를 덜하는 대신 감독만큼은 철저히 했다. 개별금고 이사장들의 불만을 샀으나 외환위기 때는 그 덕을 봤다. 이종욱 서울여대 교수는 “금고에 불상사가 생기면 이사장에게 손실을 메우라고 했다”고 말했다. 주주·임직원의 손실 분담 원칙이 새마을금고에서는 이미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한 이사장은 “연합회가 하도 귀찮게 해서 싸움을 많이 했으나 지금 와서 보면 그게 약이 됐다”고 말했다. 정부 감독으로 새마을금고의 공신력은 커졌다. 또 연합회가 경영 노하우를 전수해 금고의 내실경영을 지도했다. 이규이 당시 연합회장은 “교육기관이 있는 기업·단체는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여 연수원을 짓고 임직원을 교육했다”고 말했다. 감독·교육·안전기금이 새마을금고를 지킨 3대 기둥인 셈이다.

“20년간 이사장 하면서 월급 타 본 적 없어”
박정구 전 이사장은 “지도자는 봉사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며 “월급 받고 근무하는 사람과 이념 무장이 돼 잘해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난 20년도 넘게 이사장 하면서 월급을 타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종욱 교수는 “초등학교 학력의 이사장들이 있지만 정신이 똑바르면 누구보다 경영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논산 놀뫼새마을금고 김인규 이사장은 이를 ‘일편단심’이라고 표현했다. “금고 돈은 내 돈보다 더 귀중하다는 일편단심으로 오로지 금고와 주민을 위해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마을금고 하면 여직원이 강도와 격투를 벌였다는 뉴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연합회 관계자는 “동전·자기앞수표·천원짜리부터 내주면서 시간을 끌거나 비상벨을 누르라고 교육하는데, 직원들은 힘들게 돈을 모은 서민들 얼굴이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금고 직원들에게는 ‘끈질기다’ ‘전투적이다’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안산공단 부근의 군자새마을금고처럼 아침 9시에 열고 밤 9시에 닫는 곳도 있다. 늦게 퇴근하는 공장 근로자의 시간대에 맞추기 위해서다. 나주 동부새마을금고 이문석 상무는 “은행 직원들은 법적 책임을 면하는 수준에서 일하지만 금고 직원들은 도덕적 책임까지 느끼며 일한다”며 “좋게 말하면 주인의식이 투철한 것”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 정신과 일맥상통
새마을금고는 태생적으로 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무관하다. 마을금고는 5·16 직후 ‘가난을 벗어 던지고 잘살아 보자’는 분위기에서 출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마을금고 정신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새마을금고 역시 ‘자주·협동·개척’을 근본 이념으로 삼고 있어서다. 이종욱 교수는 “두레·계·품앗이·향약 같은 상부상조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새마을금고”라고 말했다. 백승주 고려대 교수는 “(새마을금고 이념은) 초기 마을금고 운동에 기여한 안호상 박사가 독일 예나대학에 유학할 때 보고 들은 현지 협동조합의 장점과 한국적 협동운동의 장점을 추출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풀이했다.

백 교수에 따르면 새마을금고 경영 목표는 내부 구성원의 이익에 한정되지 않고 구성원과 지역사회의 이익으로 확대된다. 지역 공헌 사업들이 이런 성격을 잘 드러낸다. 금고는 예식장·경로당·보육시설·독서실·구판장·헬스클럽·자치회관·미곡처리장·농산물저온저장시설·휴게소·주유소 등을 운영한다. 여기에 장학금 지급,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펼친다. 이런 사업은 고객들에겐 돈으로만 따질 수 없는 편익이다. 백 교수는 “금고 경영은 다소 느슨하거나 도대체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지 못하다”며 “그러나 금고 임직원, 거래자, 지역사회 또는 직장 구성원 간의 신뢰 넘치는 협력에 의해 안정적으로 이뤄지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젊은 고객 확보가 과제
취재에 응한 금고 관계자들은 대부분 임직원이 정도를 지킨다면 10년 뒤 생존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오류1동새마을금고 김현주 부장은 “충성도 높은 고객이 많은 게 강점이었으나 요즘에는 금리를 따져 보고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고객 밀착만 부르짖는 경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고객이 40대 이상에 몰려 있어 젊은 층을 파고드는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김인규 이사장은 “지방선거 출마에 앞서 금고를 선심 쓰는 정거장으로 이용하려는 이사장이 더러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규이 전 연합회장은 “지금도 사고 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언짢다”며 “이사장을 잘 뽑고 임직원을 반복적으로 교육해 바른 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합회의 자산운용 실패도 골칫거리다. 신양철 전 본부장은 “자산이 늘었으나 금융시장을 잘 몰라 운용에 어려움이 크다”며 “전문가를 더 영입하고 교육을 강화해 자산운용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범수 부사장은 “하루빨리 전산망을 연합회에 집중해 상품 개발과 상시 감독의 인프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선 새마을금고가 정말 튼튼하다면 경영공시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신 있으면 속을 까 보이라는 얘기다. 금융연구원 정찬우 선임연구위원은 “새마을금고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하지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새마을금고의 덩치가 커진 만큼 감독권을 행정안전부에서 금융감독원으로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1월 말 현재 전국의 금고는 1517개, 점포 수는 3119개다. 자산은 65조원으로 은행으로 치면 SC제일은행이나 씨티은행과 맞먹는 규모다. 금감원 이정하 서민금융지원실장은 “금융 행위에 대한 감독은 같은 기준으로 이뤄져야 시장이 왜곡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고객층이 엷어지고 기반을 대형 은행에 잠식당하는 것은 새마을금고를 비롯한 농협·수협·신협·산림조합 등 5대 조합형 금융의 구조적 문제”라며 “새마을금고도 실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서민금융의 뿌리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연합회는 “감독을 누가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80년대 초 재무부가 앞장섰던 금고 해체 시도의 악몽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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