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공책 살 돈도, 병원비도 척척 ‘화수분’ 엄마 통장의 비밀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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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엄마의 은행 통장
 캐스린 포브즈 지음, 이혜영 옮김, 반디, 272쪽, 1만800원

아빠의 월급봉투는 쥐꼬리다. 소설의 주인공 카트린은 공책 살 5센트도 아쉽지만 엄마는 걱정말란다. 은행 예금이 있단다. 앞날이 불투명할수록 현금 자산은 아껴야 하는 법. 목돈 쓸 일이 생기자 엄마는 “예금 건드리고 싶냐”며 가족들의 자구노력을 끌어낸다. 당장 아빠가 금연하는 식이다. 20년 후 작가가 된 카트린이 예금하시라고 원고료 수입을 건네자 엄마는 “처음부터 은행 통장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아이들을 불안하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첫 장(章)부터 깨끗하게 한 방 먹이는 소설은 대공황으로 치닫는 격동기였던 192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이다. 방송작가, 회고록 대필작가를 거쳐 소설가로 활동한 저자가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할머니의 체험을 토대로 1943년 펴냈다. 파산 직전의 가정 형편이 소설의 진전에 따라 차츰 풀려 나가지만 제목(원제:Mama’s Bank Account)만으로 일종의 ‘불황 탈출기’를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소설은 카트린의 고민은 물론 온갖 집안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수퍼맘 회상기’쪽에 가깝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녀 사랑이 끔찍하고 노르웨이 음식 솜씨가 일품인 엄마는 그야말로 억척스럽고 만능이다. 모자란 아버지 수술비를 절묘하게 해결하고 학교 공식 왕따인 카트린을 한순간에 ‘엄친딸’로 만든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 한 번 보이는 법도 없다.

소녀 카트린의 눈에 비친 엄마·학교·이웃에 관한 이야기이여서 자칫 청소년 소설로도 읽힐 법하다. 하지만 통과의례처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만한 그 또래 고민을 생생하게 그려내 공감의 폭이 크다. 각각 하나씩의 에피소드를 담은 17개 장으로 이뤄져 있지만 극적인 반전과 재치 있는 글솜씨 덕에 모든 이야기가 읽는 이의 마음을 건드린다.

소설을 덮고 훈훈한 마음이 돼 돌아서려는 순간 드는 생각은 과연 현실이 소설에서처럼 녹록한가 하는 점이다. 혹시 쓴 현실을 잠시 잊도록 하는 ‘당의정’은 아닌가. 엄혹한 현실을 은폐하는 문학작품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오랜 논쟁거리다. 그렇더라도 금융위기가 깜깜한 절벽으로 다가오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의정인지도 모른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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