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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신파, 그래도 엄마는 눈물을 쏟게 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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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10면

뻔한 신파다. 청승맞다. 관객들에게 “울어라, 울어라” 눈물을 짜내는 식이다. 스토리도 진부하다. 반전도, 긴장도 없다. 그럴 거라 누구나 예측한 대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런데.
좌석은 연일 매진이다. 관람료 4만4000원. 부담스러울 법한 가격인데도, 암표까지 등장했다. 표를 못 구한 관객들의 요청에 따라 연장 공연도 한다. 불황기 공연계의 이변이다.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고혜정 극본, 구태환 연출, 강부자·전미선 주연) 얘기다. 당초 3월 2일까지 공연할 계획이었지만, 8일까지로 늘렸다. 연장공연 인기도 대단하다. 지난달 16일 오후 6시 인터파크를 통해 연장공연 티켓 예매를 시작하자 단 24분 만에 주말 티켓이 매진됐다.

왜일까.
‘친정엄마와 2박3일’ 열풍은 출간 석 달 만에 40만 부가 팔린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인기와 일맥상통한다. 불황을 타고 등장한 ‘엄마 신드롬’이다. 무조건 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 엄마. 그 엄마를 기억하면서 위안을 받겠다는 심리다.

‘친정엄마와 2박3일’은 간암 말기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딸과 그 엄마의 이별 이야기다.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독한’ 설정이다. 작가 고혜정씨의 어머니조차 “세상에 쓸 게 얼마나 많은데 새끼 죽는 걸 왜 쓰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작가는 ‘아, 나에게 엄마가 있다는 걸 잊고 살았구나’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 굳이 ‘죽음’이란 장치를 갖다 썼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딸 미영이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시골 친정집에 내려왔다. 모두 타지로 떠나고 아버지도 돌아가신 친정집. 엄마 혼자 쓸쓸히 지키고 있는 집이다. 난방도 제대로 하지 않고, 뜨거운 물에 찬밥 한 덩이 말아 먹는 것으로 식사를 때우는 엄마. 엄마의 궁상맞은 모습에 미영은 화가 나고, 엄마는 연락 없이 내려온 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속상하다. 꺼칠한 얼굴, 깡마른 몸으로 잠든 딸을 보며 엄마는 혼잣말을 한다.

“힘들면 엄마한테 올 일이지. 어렵고 힘들 때 젤로 생각나는 사람은 엄만데. 막막하고, 속상할 때 찾아갈 곳은 엄마뿐이데. 엄마가 해결은 못 해줘도 속 시원하게 들어줄 텐데. 엄마가 도와주지는 못해도 내 새끼 속상한 마음은 누구보다도 알아줄 텐데. 엄마한테는 다 괜찮은 것이다. 엄마는 새끼가 입만 달싹해도 새끼 맘 안다.”
그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대상, 각박한 세상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울컥 서러움이 복받친다. 관객들의 눈물보가 터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관객 대부분은 40∼50대 중·장년 여성들이다. 경제 불황은 이들의 고민을 깊게 했다. 남편은 이제 일을 놓을 나이. 그런데 부동산이며, 펀드며 평생 모은 자산이 자꾸 줄어들어 노후가 막막하다. 있는 힘 다해 키운 자식들 독립시키기도 녹록지 않다. 취직하기도, 결혼하기도 어려운 세상이어서다. 한가하게 ‘빈 둥지 증후군’을 느낄 겨를이 없다.

‘내가 무너져선 안 된다. 내가 흔들리면 남편과 아이들도 흔들린다’.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을 쥐고 실질적인 ‘가모장(家母長)’으로 살아온 40∼50대 주부들의 절박한 심정이다. 그런 이들에게 “속상한 마음 다 안다”고 하니, 긴장이 턱 풀릴 수밖에.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가 모든 걸 엄마에게 맡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극중 미영과 엄마도 함께 지내는 2박3일 동안 지난 삶을 돌아본다.

공부 잘하는 딸. 엄마는 그 뒷바라지에 신이 났다. 담임교사 집에서 무급 파출부 노릇을 했어도 힘든 줄을 몰랐다. ‘딸’을 서울까지 보내 대학 공부 시킨다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댈 때도, 엄마는 “부러워서 그런 것”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미영의 삶은 엄마의 울타리 안에 있었을 때 가장 반짝반짝 빛났다. 머리에 이가 생겼을 때도, 키우던 토끼를 외삼촌이 잡아먹어 속상했을 때도 “엄마∼” 부르면 끝이었다. 엄마는 늘 미영의 편에서 해결사가 돼 줬다.

“나를 제일 사랑해주는 사람, 내 맘을 제일 잘 아는 사람, 나를 제일 잘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제일 예쁘다고 하는 사람, 내 얘기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바로 엄마라는 거. 나 이제야 알고 떠나요.” 미영의 독백이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있다. 엄마를 떠올리는 순간, 제 자존감은 수직상승한다. 더욱이 과거는 미화된다. ‘내 엄마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던 나’를 돌아보며, 관객들은 펑펑 눈물을 쏟는다. 눈물의 카타르시스 뒤로 “내가 어떤 사람인데”란 자긍심이 고개를 든다.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팍팍한 세상살이쯤이야 ‘우습게’ 보이는 것도 순간이다. 불황에 이런 약이 없다.

‘엄마 신드롬’의 끝은 어디일까. 엄마를 잊을 만큼 사는 재미가 쏠쏠한 그날이 언제일지, 아직은 예측 불허다. 지난 1월 17일 서울 동국대 이해랑극장에서 시작된 ‘친정엄마와 2박3일’은 이미 2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3월 8일까지 서울 공연을 마치고, 이후엔 지방 순회공연(3월 21~22일 경기도 문화의전당, 28~29일 대구시민회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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