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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유럽문화 통신]속도를 표현하겠다고? 움직임을 해체해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3호 11면

1 움베르토 보초니 ‘술 마시는 사람’(1914), 캔버스에 유화, 86 x 87㎝

저녁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어디선가 음악과 함께 TV를 크게 틀어 놓은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저만치 보이는 밀라노 궁전의 벽이 야외 극장 스크린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붓이 왕궁의 벽을 휘두르고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가 어두워졌다. 붓은 다시 작은 점들을 찍기 시작했고 점들은 물고기처럼 왕궁 벽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미래파 100주년전’ 이탈리아 밀라노 궁전, 6월 7일까지

올해는 근대 예술 사조의 하나인 ‘미래파’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09년 2월 이탈리아 시인이며 잡지 편집인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가 프랑스 파리의 신문 ‘르 피가로’에 미래파 선언을 기고하며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회화·연극·사진·조형물·패션·건축 등의 분야로 확산됐다.

2 비르질리오 마르키 ‘비행기에서 본 건물’(1919), 종이에 템페라, 130 x 145㎝3 움베르토 보초니 ‘공간에서 연속되는 독특한 형태’(1913), 브론즈, 112 x 40 x 90㎝

이를 기념한 행사가 밀라노에서 시작됐다. 2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밀라노 궁전에서 열리고 있는 ‘미래파(FUTURISMO)’ 전시가 대표적이다. 이 행사는 240점이 넘는 그림·사진·조형물·책·포스터·무대의상·건축 디자인 등을 통해 미래파가 추구했던 다양한 움직임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속도+예술+행동’이라는 부제에서 보이듯 미래파 화가들은 속도감과 역동성을 찬양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것-자동차, 달리는 동물, 사람들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대상의 윤곽을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앞서 소개한 야간 쇼는 미래파를 주제로 한 비디오 아트로, 전시가 시작된 2월 6일부터 열흘간 밀라노 궁전의 외벽서 네 시간 동안 펼쳐졌다. 이탈리아 조명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영상은 올여름까지 이탈리아 주요 도시를 돌며 상영될 예정이다.

전시에서 나의 눈길을 끈 작품은 무엇보다 움베르토 보초니의 브론즈 작품(사진 3)이다. 이 전시뿐 아니라 몇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보초니 전시와 런던에 갈 때마다 들르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도 보았던 것이다. 예전에 미술사를 공부할 때부터 미래파의 대표작으로 배워서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지만, 볼 때마다 작가의 해석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형상 옆에 율동감 있는 선을 겹겹이 그려 넣어 움직임을 설명했겠지만, 그 느낌을 동상으로 제작한 것이 실로 놀라울 뿐이다.

다음으로 내가 오랫동안 발길을 떼지 못한 작품 역시 보초니의 작품, ‘술 마시는 사람’(사진 1)이었다. 입체파와 인상파, 그리고 보초니의 개성이 모두 담겨 있는데, 동상에서 사용된 움직임의 해체가 이 그림에도 표현되어 있다. 술 마시는 사람의 고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전시장 말미에 이르렀을 때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다.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모로코 페스의 가죽 다듬는 곳에서 맡아 본 냄새다. 전시장에는 당시 미래파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극장 무대가 설치되었고 그 옆에 모로코 가죽으로 만든 무대의상을 입은 마네킹들이 서 있었다. 당시 장식 미술이 건축과 오브제, 음악, 그리고 패션에 미친 영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모로코 가죽이 냄새가 나는 이유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듬기 때문이고 이 전시회에 모로코 가죽을 사용한 이유는 전시회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친환경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 유럽을 돌며 각종 전시회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 『더 주얼』(2009)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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