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의 서핑차이나] “미국 국채는 이 시대의 아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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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채는 신시대의 아편이다”
지난 24일 홍콩 동방일보는 칼럼에서 미국 국채 딜레마에 빠진 중국을 이렇게 비유했다.
중국이 미국 국채를 계속해서 구매한다면 중국의 미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구매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보복이 예상될뿐더러 이미 보유한 7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 가치가 폭락해 큰 손실을 볼 것이다(그래픽). 진퇴양난에 빠진 중국은 미국 국채 판매 사원으로 변신한 힐러리의 ‘동주공제(同舟共濟,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라는 주문에 홀려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초라한 중국의 성적표=힐러리는 중국이 미국 국채를 계속해서 구입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국했다. 이에 반해 중국은 티베트,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을 유예시키는 정도의 대가를 얻는데 그쳤다. 중국의 초라한 성적표에 홍콩 언론들이 비판에 나섰다. 미국은 과거 중국에 최혜국대우를 연장해 주면서도 중국의 인권·민주화 문제를 꼬집은 바 있다. 국채 구매라는 선물을 주면서 중국이 미국에 기술 이전이나 대만 해협에서의 군사력 철수와 같은 대가를 요구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미국의 힘을 알고 있다. 지난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서방 국가들이 각종 제재를 내놓자 덩샤오핑은 “냉정히 관찰하고, 기반을 튼튼히 하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패권주의를 획책하지 않을 것(冷靜觀察, 穩住陣脚, 沈着應付, 決不當頭)”과 “신뢰를 강화하고, 마찰을 감소시키고,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며, 대항을 하지 않을 것(增加信任, 減少麻煩, 發展合作, 不敲對抗)”을 주문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한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발전했다”라 말하며 개혁개방정책을 결정한 것도 덩샤오핑이었다.

◇미국 재무부 채권은 아편전쟁 당시의 아편=지금으로부터 170년 전인 1839년 황제의 전권을 받은 임칙서(林則徐, 1785~1850)는 흠차대신으로 광저우(廣州)에 부임했다. 임칙서는 곧 영국 상인들의 아편 1200여 톤을 몰수해 파기했다. 영국 의회는 곧 중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원정군을 파견해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아편이 중국에 대규모로 유입된 것은 당시 영국이 고질적인 대중국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미국 국채와 같이 대중국 무역역조를 해결하기 위한 영국의 수출품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은 차(茶)문화가 보급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차를 수입했다. 그밖에도 중국의 생사와 면포, 도자기 등을 수입했으나 영국은 마땅한 대중 수출품이 없었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아편을 전매하고 아편의 대중국 무역을 독점하면서 무역 역조를 해결했을 뿐더러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아편의 대량 유입으로 은(銀)의 유출에 고심하던 청조는 아편엄금론자인 임칙서를 파견해 아편을 몰수 폐기하면서 당시 재정위기에 빠져있던 영국에게 침략 구실을 주었다. 아편전쟁 발발부터 개혁개방이 성공할 때까지 중국은 와신상담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미·중의 와신상담(臥薪嘗膽)=역사의 시계바늘을 앞으로 더 돌려보자. 춘추시대 오(吳)나라왕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의 보필을 받으며 남쪽 신흥강국 월(越)나라를 공격했다. 월나라왕 구천(句踐)은 책사 범려(范蠡)의 지략에 힘입어 합려를 물리친다. 이 전쟁에서 패한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에게 복수의 유언을 남기고 전사한다. 왕위에 오른 부차는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간다(와신 臥薪). 부차의 동태를 보고 받은 구천은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오나라를 다시 공격하나 부차에게 참패한다. 막대한 배상금과 굴욕적인 화약을 맺고 돌아온 구천은 곰의 쓸개를 핥으며 재기의 기회를 노린다(상담, 嘗膽). 주군인 구천을 위해 범려는 희대의 미인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보내 미인계를 펼친다. 드디어 결전의 날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복수전을 마무리 짓는다.
그 와중에 오나라의 오자서는 미인계에 빠진 주군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내 눈을 뽑아 성문에 매달아 달라. 오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전쟁이 끝나자 범려는 “토끼가 죽어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죽인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남긴 채 제(濟)나라로 탈출한다.

힐러리가 이번 아시아 순방을 하루 앞둔 13일 낮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설 말미에서 외교적 레토릭인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말을 던졌다. 오월동주(吳越同舟)로 잘 알려진 이 고사는 춘추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의 물고 물리는 패권경쟁 속에서 나왔다. 즉 월나라 격인 미국의 범려 힐러리가 주군인 구천 오바마를 대신해 오나라인 중국에 사신으로 온 격이다. 오나라의 재상 격인 원자바오는 이에 ‘휴수공진(携手共進:손잡고 함께 나아가자)’으로 화답했다.

◇아직은 전초전 단계=미국은 이번 힐러리의 중국 방문에 ’경청지려(傾聽之旅)’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탐색 단계란 이야기다. 중국 역시 미국의 속셈을 모르는바 아니다. 중국은 미국의 저력을 잘 안다. 80년대 전세계를 집어 삼킬듯한 기세의 일본 경제가 어떻게 미국에게 농락당했는지 철저히 연구했다. 중동 산유국의 오일달러가 미국 국채를 사지 않더라도 사회기반시설 건설이라는 명목 하에 미국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는 시스템도 모르는 바 아니다. 미국은 금융 위기 극복 능력이 뛰어나며 위기에서 벗어난 이후 더욱 패권이 강해졌던 사례들도 계산해 놓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진검승부는 이번 금융위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전개될 듯하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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