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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부산의 한 대입학원 재수생 '집단 일기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지난해 5월 부산 대신학원 (원장 이형봉) 문과 2반 학급원 30명은 엉뚱한 결정을 했다.

수능시험 때까지 '집단 일기장' 을 쓰기로 한 것이다.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재수생활의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교실에서, 기숙사에서, 심지어 집에 가져가서까지 일기장을 채워나갔다.

아무런 형식제한 없이 무기명으로 몇줄씩, 때로는 몇장씩 써내려간 노트가 수능시험을 끝낼 무렵에는 3권이나 됐다.

각권별로 '좋은 생각.기쁜 내일' '쉼터' '빅 아이디어스' 라는 이름이 붙었다.

담임인 이대규 (32) 교사는 이 일기장을 학생지도에 적극 참고했다.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뭘 도와줘야 할지를 살피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 입시가 끝난 후 그는 이 공책들을 '재수 실록' 이라 불렀다.

싸늘한 냉대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들의 얘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의 기록은 보는 이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갓 성인이 된 나이에 엄청난 패배감과 번민을 안은 젊은이들. 이어지는 긴장의 나날들이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만들고 있는 모습. 그런 것들이 일기장 속에서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재수의 시작]

재수를 시작할 무렵, 비애가 군데군데 스며 있었다.

"새벽 2시25분. 아주 큰소리로 지독한 방귀를 뀌고 싶다. 가려운 사타구니를 긁은 더러운 손으로 상추쌈을 싸먹고 싶다. 이빨로 발톱을 물어뜯고 싶다.

엄지 발가락으로 코라도 후비고 싶다.

내일은 모의고사 치는 날. 세상에서 제일 잘난 이 아들이 내년엔 꼭 S대에 들어갈 거라고 믿고 계신 엄마가 이 아들이 이 엄청난 불안감에 1시간째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는 걸 아신다면…"

"이달은 너무 잔인하다. 말하자면 힘들다.

삶의 목표들이 흐려진다. 난 무엇인가.

심한 허무와 무기력. 죽어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 이 순간 나는 하나의 먼지에 불과하다. 귀찮다. "

[늦봄의 자학]

늦봄이 되자 고통스런 자학의 사연이 흘러나오고.

"난 재수생이다. 누군가 말했지만 재수생은 인간이 아니다. 여성이 좋아하는 최고의 남자 2위는 직업군인, 1위는 민간인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재수생은 아마 3위쯤 되겠지. "

"고독해지는 이런 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있을까. 있다 해도 멀리 떨어져 있다.

너무도 안타깝다. 나를 위해 모든 사소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 나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돼버린 것 같다. 시험까지 며칠이나 남았나?"

"내 몸은 불러오는 아랫배와 커진 엉덩이로 볼품이 없어졌다. 점수 1점을 더 받으려는 노력이 초래하는 엄청난 부담감.불안감. 어딘가 탈출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하루하루가 재미없다. "

[흐르는 시간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이기려는 처절한 싸움.

"요즘 나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이는 피곤한 몸과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행위다. 하지만 그 내부에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은 전처럼 장난기 많고 언제나 웃는 모습일 것이다. 여름은 끝났다. "

"끝이 보인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우리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수능시험은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아픔을 주지만 언젠가는 끝난다. "

['색다른'음악소리]

재수생이라는 신분은 같은 것에도 색다른 생각을 하게….

"비디오방에서 '은밀한 유혹' 이라는 영화를 봤다.

남자 주인공이 벽돌을 들고 이런 말을 한다.

'이런 하찮은 벽돌도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한다. ' 지금 내 모습은 어떤가.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목표가 있다. "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에서 꼬마가 악당에게 총을 맞아 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누들스 나 졸려. ' 나는 졸릴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봤는데. "

" '굿바이 마이 프렌드 (Good - bye my Friend)' 라는 영화를 봤다.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를 위로하는 어린 친구의 이야기다.

가끔 잠자다 가위 눌릴 때가 있다. 그때 이런 그 친구처럼 편하고 사랑스럽게 나를 위로해 주는 엄마가 보고 싶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엄마처럼 나를 감싸안아 줄 여자인지도 모른다. "

" '쉴 곳을 찾아서 결국 또 난 여기까지 왔지. ' 인기그룹 전람회의 노래인 '이방인' 시작부분이다.

지금 우리에겐 마땅히 쉴 곳이 없다. 우리는 확실히 이방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날개가 있다. 날자. "

[칙칙한 성년의 날]

그러면서 이들은 성인이 되어갔다. 이미 어른이었다.

"어제는 성년의 날이었다.

난 어제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었다.

장미나 향수, 그리고 키스등을 받는다고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한날한시에 76년생 모두가 성년이 된다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다.

다만 사회에서 '책임의식' 을 느끼려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미래를 잠시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

"마지막 자습시간에 나는 문득 여지껏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느낀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건 남자들의 땀내음과 그들의 칙칙한 모습들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한 급우의 뽀얀 피부에서부터 또 다른 급우의 터프한 피부까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으윽, 내가 호모가 되고 있다는 말인가. 재수생활이 나를 구속하고 속박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닌가. "

[인간적 성숙]

헛된 경험이었을까. 시련은 있어도 젊음은 약해지지 않았다.

"재수. 벌써 6월에 접어 들었다.

시간상으로는 몇달에 지나지 않지만 나에겐 인생에서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 이렇게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막연한 불안, 친구와의 갈등, 동생에 대한 걱정. 하지만 그런 고통을 참아낸 지금 난 너무 편하다. 싫고 짜증나던 일도 좋은 각도에서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찾게 됐다. "

"태어나서 20년만에 처음으로 선물이란 것을 아버님께 해봤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

"이 새벽 산사에서 기도하고 돌아오시는 어머님의 소리가 들린다. 눈물이 난다. "

"지난 주말 귀가 길에 책을 갖고 갔지만 어깨만 아팠을 뿐 한자도 보지 않았다. 오랫만에 피아노를 쳤다. 손이 굳었다. 맘에 안 든다.

이젠 친구들에게서 전화도 안온다.

대학생은 그들대로, 재수생은 그들대로 바쁠거다.

시간이 정말 잘 간다. 고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끝없는 자책.반성, 그라고 변화. 우리 모두가 부정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하자. 이번 주엔 스승의 날도 있구나. "

"지난해 여름 나는 '내년 이맘 때는 편안하고 즐겁게 놀 수 있겠지' 하는 기대로 마음을 잡고 살았다. 그런데 또 이렇게 비참한 여름을 맞고 있다.

그러나 내겐 아직 희망이 있다. "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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