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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민요기행]4. 우창시 민웨향 둥광촌·옌수현 핑안향 싱광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헤이룽장 (黑龍江) 성 우창 (五常) 시 민웨 (民樂) 자치향과 옌수 (延壽) 현 핑안 (平安) 자치향에 경상도와 평안도에서 집단이주해 와서 정착한 부락들이 있다고 해서 그 지방의 풍습과 노래가 남아있을까 찾아갔다.

옌볜 (延邊) 과는 달리 까마득히 지평선이 펼쳐진 망망한 들판에 섬처럼 엎드린 마을이었다.

민웨자치향은 하르빈서 세시간 거리. 국도를 두시간쯤 달리다가 논사이로 수로를 따라 난 길을 삼륜차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다시 한시간쯤 먼지를 뒤짚어 쓰며 달리니 나타났다.

민웨향에는 8개의 조선족촌이 있는데 그 하나인 둥광 (東光) 촌에 마침 환갑잔치가 있대서 우선 그곳부터 들렀다.

2백40호중 조선족이 2백호인 큰 마을로 낮은 초가집 사이에 군데군데 기와집이 박혀 있다.

이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1938년. 그 2~3년전에 경북의 안동.김천.경주등지에서 일제에 땅을 빼앗기고 반강제로 집단이주해 왔으나 정착을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다가 만몽 (滿蒙) 개척조합이 사들인 땅을 개간하고 물을 끌여들여 정착한 것이다.

잔칫집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 들어 법석을 떨고 있었는데 한집 잔치가 동네 잔치가 되는 것은 그 만큼 응집력이 강하다는 증거다.

오늘의 잔치는 요란한 폭죽으로 시작되었지만 옛날에는 으레 풍물을 놀았다고 한다.

이제는 늙은이들은 죽거나 살아 있어도 기운이 없고 젊은이들은 배우지 못해 풍물은 다락에서 낮잠을 잔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도 좋았다.

바로 8㎞쯤 떨어진 같은 민웨향의 윈승둔에서 김모순 (71) 이라는 김천에서 열일곱살에 들어왔다는 할머니로부터 '시집살이요' 와 '베틀노래' 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세타령 끝에 할머니는 우리를 경상도 사투리로 귀청이 떨어질 것같은 동네사랑방으로 끌고 가서 동네사람들과 함께 노래가락이며 '창부타령' 까지 들려주었다.

거리로 보면 민웨향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지만 잘 곳이 마땅치 않아 하르빈으로 돌아왔다가 찾아간 옌수현 핑안향 싱광 (星光) 촌은 차가 몇번이고 처박힐 만큼 길이 험한 벽지였다.

1백40호가 몽땅 조선족으로 터를 널찍하니 잡은 집 사이의 길 또한 널따랗고 외양간.장광이 따로 있고 옥내에 펌프로 푸는 우물이 있었는데 재래식 흙집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수풍댐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1937년 평북삭주군 벽동면에서 3백여명이 함께 이주해 와서 버드나무밭을 파헤치고 건설한 마을로 아직도 그 후세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

이웃과 교통이 빈번하지들 않아 억센 평안도 사투리가 그냥 남아 있고 결혼도 평안도 사람끼리 하는 것이 보통이다.

평안도 풍습도 그대로 살아 있어 가령 복날에는 복달임으로 깨와 콩을 갈아 새알을 넣은 깻국을 끓여 먹고 강냉이로 조롱묵을 쑤어 먹는다.

복날이 며칠 지나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미루고 있던 복달임을 이날에서야 했다.

'수심가' '엮음 수심가' '긴 아리' 같은 평안도 민요도 남아 있어 김창수 (81) 할머니와 김식홍 (69) 노인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우리는 새로 지은 개량주택들이 많은 아랫마을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밤에 보름이 가까운 달아래서 마당에 모깃불을 놓고 전등을 내어 건 술판이 벌어졌다.

술판은 예외없이 춤판으로 이어졌는데 젊은이들은 역시 민요보다 주현미와 나훈아의 노래를 더 많이 불렀다.

〈시인 신경림 〉 ( '신경림의 조선족 민요기행' 은 9월16일 오전11시 케이블 Q채널에서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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