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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록&論]아름다운 베테랑 여가수 장필순,이은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파스텔톤의 아련함과 짙붉은 색 바탕에 모노톤의 초상. 입추 (立秋) 를 넘어서며 나란히 선보인 장필순의 다섯번째 앨범과 이은미의 세번째 앨범은 재킷 디자인부터 강렬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표명하고 있다.

H.O.T와 클론.젝스키스.디제이덕.지누션 같은 댄스 팀들이 성수기의 여름시장에서 경합을 펼쳤지만 작년과 비교할 때 45% 매출수준이라는 최악의 바닥에 머물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지난 겨울 양파와 리아 같은 신인의 등장으로 오랜만에 기지개를 켤 것으로 예상했던 여성 뮤지션들은 엄정화의 '반짝 성공' 을 제외하면, 룰라에서 독립한 김지현의 예처럼 참패를 거듭했다.

장필순과 이은미의 신작 앨범이 다 무너진 주류 (主流) 시장의 논리를 단숨에 일으켜 세울 거라고 믿는 순진한 이는 더이상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이미지는 너무 확고해서 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적 시선으로 보면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치기 십상일 터다.

장필순과 이은미의 두 앨범은 이런 세태에 대해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인다.

그러나 그 미소의 내면에는 음악에서의 진정한 변화란 성숙의 과정에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는 화두가 숨어 있다.

장필순의 가장 뛰어난 무기는 데뷔 앨범의 '어느새' 부터 보여주었던 세련된 보컬이 아니라 조동진을 정점으로 하는 음악집단의 공동체 정신이다.

이들은 얼룩진 스타 시스템 신화의 반대편에서 멸종의 위기에 처한 음유시인의 미덕을 보존.발전시켜 왔다.

조동진과 조동익 밴드, 한동준과 더 클래식, 낯선 사람들에 이르는 이 조용한 뮤지션들은 2년반 전에 와해된 '하나 뮤직' 의 깃발을 다시 올렸고 '음악만이 내 세상' 인 자들의 보금자리를 튼실히 꾸렸다.

포크의 향기가 록과 퓨전에 스며든 장필순의 이 신작은 다름 아닌 음악 공동체 재건의 첫번째 신호탄인 셈이다.

앨범을 여는 곳인 '첫사랑' 에서 빚어지는 보컬과 조동익 밴드의 연주, 그리고 이 사단의 절제된 코러스 사이에 이루어지는 절묘한 조화를 보라.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저 추억에 잠기게 하지 않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추적하게 만든다.

열두곡이 빼곡히 채워진 이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문득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술을 부린다.

함춘호의 어쿠스틱 기타만으로 이루어진 '풍선' 과 윤영배가 만든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 , 그리고 장필순 자신에 의한 '그래!' 로 이어지는 앨범의 중반부는 이들의 투명한 직관이 빛나는 조용한 클라이맥스이다.

장필순의 앨범이 초가을 밤에 혼자 듣는 것이라면 이은미의 것은 우리를 뜨거운 분위기의 클럽으로 인도한다.

음반사와의 마찰로 무려 삼년만에 신작을 선보인 이 '맨발의 불꽃' 이은미는 주체할 수 없는 음악의 에너지를 한순간에 연소시켜버린다.

이 앨범의 백미는 분류 불능의 개성파 피아니스트 한충완이 가담한 '시선' .이 곡은 이은미가 그 동안 맞지 않은 옷을 입었던 것같은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한판의 퍼포먼스다.

수록된 곡의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참을 만큼 참은' 뒤에 터뜨린 무대 위의 사자후와 같다.

역시 베테랑은 아름답다.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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