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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승정원일기 옆에서 반년 넘게 잠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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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전쟁 때 이 책들을 지켜내느라 고생한 생각을 하면…. 이렇게 잘 간직돼 있는 걸 보니 이제 걱정이 없습니다."

1948년부터 25년간 서울대 규장각 사서를 지낸 백린(82)씨. 백씨는 한국전쟁 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국보303호, 세계기록유산).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국보 152호).일성록(日省錄.국보153호) 등 규장각 국보급 도서 3000여권을 부산으로 옮겼던 주역이다.

16일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규장각을 다시 찾았다. 73년 미국으로 떠난 지 31년 만이다.

백씨는 이날 서울대 교수와 후배 사서들을 모아 놓고 '6.25 동란과 규장각'이란 주제로 강연하며 규장각과 고서에 대한 애정을 풀어냈다.

"북한군이 공무원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에 3개월을 숨어지내다 9.28 수복 후 다시 규장각에 나가봤어요. 도서관 직원 40명 가운데 남아있는 사람은 다섯명뿐이었고, 승정원 일기 등 몇몇 고서들도 없어졌더군요."

북한군은 급했던지 경기도 의정부쯤에서 고서들을 내팽겨쳤고 이를 미군이 주워다 국립박물관 등에 맡겼다고 했다. 흩어진 도서를 정리할 여유도 없었다.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11월 4일 규장각에 소장 중인 고서들을 부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미군 트럭 8대에 나눠 실은 뒤 서울역에 대기 중인 화물열차로 옮겼습니다. 새끼줄로 대충 묶여 있거나 낱권으로 뒹굴고 있는 책들을 본 백낙준 당시 문교부 장관께서 '조선 500년 역사를 이런 식으로 다루느냐'고 호통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백씨는 "일주일 만에 부산에 도착해 승정원일기는 대청동 관재처 창고에, 일부 도서는 대한부인회 경남지부 창고와 경남도청 무기고 등에 보관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에 간 이후 혹시라도 분실될까봐 반년이 넘도록 승정원일기 옆에서 잠을 잤다"면서 "신혼이었는데도 아내보다 자료 곁에서 잔 날이 더 많았다"며 웃었다.

백씨는 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규장각에서 미국 하버드대의 학술연구비를 지원받아 도서목록 현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73년에 도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한국관 사서로 근무하다 92년 은퇴했다. 현재 부인과 매사추세츠주에 살고있는 백씨는 '뉴잉글랜드 한국이민 100주년사'를 편찬 중이다.

글.사진=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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