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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외길 속 양념갈비 대박…“스시·쌀국수와 겨룰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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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캐나다 수퍼마켓에 가면 낯익은 한국식 발음의 육류 제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Bulkokee(불고기)’ ‘Maecomi(매코미)’ ‘Coksomi(콕소미)’ 등으로 이름 붙여진 육포는 그중 가장 인기가 높다. ‘Kal-Bee(갈비)’라는 상표의 양념갈비도 캐나다인이 즐겨 찾는 품목이다. 이들 제품에는 한인 교포 한 사람의 땀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초원유통 안평국(56·스티븐 안·사진) 사장이 그 주인공. 양념갈비와 불고기·육포 등 우리 고유의 음식과 조리법으로 캐나다와 미국인의 입맛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그의 비결은 무엇일까.

마흔에 던진 또 한번의 도전장
‘토종’ 한국인이던 그가 캐나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 훈련소에서 카투사로 차출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배치되면서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미군 사령관의 추천으로 제대 후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게 된 그는 영문학을 전공한 덕에 미국 지사 근무자로 뽑혀 휴스턴으로 건너갔고, 82년 밴쿠버 지사로 옮기면서 캐나다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사귄 현지인들의 추천으로 앨버타 주정부 공무원으로 특채돼 1년 반 동안 농림부에서 근무도 했다.

호사다마였을까. 오일 특수가 사라지면서 캐나다 전역에 감원 태풍이 불었고 그 와중에 안 사장도 실직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다시 밴쿠버로 돌아온 안 사장은 조그만 커피숍을 차렸다. 사무실 건물 한편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였다. “새벽 4시부터 아내와 함께 1년 365일 쉬지 않고 일했어요.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하면 분명 기회가 올 것으로 믿었죠.” 실제로 그랬다. 10년 새 가게를 세 곳으로 늘렸다.

그럼에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가슴 속 빈 구석이 있었다. “좀 더 큰 목표에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캐나다인의 전유물처럼 돼 있는 도매업에 진출해 그들과 당당히 겨뤄 보고 싶었죠.” 그러던 중 현지 식당에 갔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 음식은 물론 일본 스시, 베트남 쌀국수, 인도 카레, 심지어 태국 요리까지 아시아 각국의 음식을 판매하는 체인점이 다들 있는데 유독 한국만 없는 거예요. 제가 비록 한국인이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한국 음식만큼 맛과 향과 시각적 측면에서 뛰어난 음식이 드문데 다른 아시아 음식들만 알려져 있는 게 억울하고 답답했어요.”

그때 그는 “그래, 한국 음식으로 승부를 걸어 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캐나다인이 2대째 운영해 온 식품업체에 평직원으로 입사했다. 먼저 식품업 노하우를 익혀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92년, 한국 나이로 마흔 살에 던진 또 한번의 도전장이었다. “정말 죽어라 열심히 일하며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장이 부르더군요. 자기가 암에 걸렸는데 보아하니 제가 회사를 맡으면 가장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거절했지만 그 사장은 “돈은 천천히 줘도 된다”며 회사 인수를 거듭 요청했다. 결국 입사한 지 1년 반 만에 회사를 인수한 뒤 이름도 초원유통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에 뛰어들었다.

한인 최초로 따낸 캐나다 정부 인증
하지만 유통업체만으로는 한국 음식을 제대로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생산부터 유통·판매까지 전 과정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음식의 질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는 현지 목장주들을 찾아가 설득에 나섰다. 숱한 시도 끝에 ‘하이랜드 비프’라는 중견 목장과 합작하는 데 성공했다. ‘한카 퀄리티 푸드’라는 육가공품 제조회사도 설립했다. 목장에서 생산된 질 좋은 앨버타산 쇠고기로 양념갈비와 양념불고기, 각종 육포를 만든 뒤 초원유통의 배급망을 통해 일선 수퍼마켓에 공급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현지 교포들조차 “한국식 쇠고기 요리가 캐나다에서도 통할까”라며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대성공이었다. 아시아계인은 물론 스테이크만 즐겨 먹던 캐나다인도 맛깔스럽게 양념이 버무려진 양념갈비와 불고기 맛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신감을 얻은 안 사장은 2006년 캐나다 최대 편의점 유통업체와 손잡고 초원유통의 인기 상품을 코스트코, 세이브 온 푸드 등 캐나다 전역의 수퍼마켓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산 쇠고기의 품질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에요. 옥수수를 주로 먹이는 미국과 달리 보리를 먹여 한우와 맛도 비슷하죠. 한국 사람들이 캐나다산 쇠고기를 먹어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5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LA와 시애틀 등 서부 지역 편의점에 양념갈비와 육포를 공급해 큰 인기를 끌었다. 조만간 미국 동부 지역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김치·햇반·김·알로에·우동 등 한국 음식도 수입해 양념갈비와 함께 공급했다. 캐나다인이 한국 음식을 최대한 많이 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96년에는 대한항공·루프트한자·에어캐나다와 기내식 공급 계약을 하고 불고기와 비빔밥, 각종 나물들을 전 세계 승객들에게 선보였다.

이 같은 성공의 이면에는 끊임없는 품질관리 노력이 숨어 있었다. 2002년에는 까다롭기로 이름난 캐나다연방식품검역청(CFIA)에서 양념갈비·양념불고기·양념돼지불고기와 육포 세 종류에 대해 정식 식품허가를 받았다. 2006년에는 미국 농무부(USDA)의 식품 공인도 획득했다.

‘2명의 김연아’ 덕에 韓流 확산
그는 지난 16년을 ‘고독과 싸워 온 시간’이라고 했다. “음식은 그 특성상 수입이 어려워 누군가가 현지에서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만든 뒤 판매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제겐 너무 힘든 과정이었어요. 정부의 식품 허가를 받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고…, 유통과 마케팅 관문을 통과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가는 길이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불가능해 보였지만 사명감 하나로 버텨 왔다고 했다.

“이젠 한국 정부도 적극 나서야 할 때입니다. 음식을 통한 한국 문화 홍보와 이미지 제고 효과는 상상을 초월해요. 마침 내년엔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열려 전 세계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됩니다. 한국 음식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겁니다.” 올 초 캐나다 최초의 한인 상원의원이 된 연아 마틴(43·한국명 김연아)과 얼마 전 밴쿠버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 등 ‘2명의 김연아’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아진 점도 호재다.

그의 꿈은 뭘까. “캐나다 전역에 한국 음식 전문 판매점이 들어서는 걸 꼭 보고 싶어요. 그곳에서 한국인은 물론 캐나다인과 아시아계인이 한데 어울려 한국 음식을 즐기면 얼마나 보기 좋겠어요.”

캘거리·밴쿠버=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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