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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칼럼] 내 票를 크게 하는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천도교 교령과 제1야당 고문을 지낸 사람이라면 종교 지도자요 사회 지도층 인사다.

그런 오익제 (吳益濟) 씨가 돌연 월북을 했다면 그건 분명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건이고 왜 그런 일이 났는지 걱정하고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신한국당엔 이 사건이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이었던 것같다.

이회창 (李會昌) 대표 아들문제로 몰리고 몰렸는데 뜻밖에 반격의 호재 (好材)가 나왔으니 걱정은커녕 반갑기 짝이 없다는 분위기다.

즉각 포문 (砲門) 을 열어 "왜 하필 DJ주변에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가" 고 공격을 시작했다.

걱정할 국사 (國事)가 정치권에 오면 반가운 호재로도 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국민회의측의 반격에서도 국사는 볼 수 없고 당사 (黨事) 만 보일 뿐이다.

조순 (趙淳) 서울시장이 출마를 선언하자 여야 모두에서 "한방에 날릴 수 있다" "趙시장에 관한 자료는 많다" 는 얘기가 나왔다.

며칠 전 신한국당 강삼재 (姜三載) 사무총장은 "야당 두 金총재에 대해서는 장학로사건 때 비축해둔 자료가 몇 건 있다" 고 했다.

자민련에서는 신한국당 다수의원에 대한 병역문제를 제기했고 신한국당에서는 심지어 JP가 탈영병이었다는 말까지 흘렸다.

모조리 상대방의 뒤를 캐고 약점을 잡아 폭로하고, 폭로할 거리가 있다는 협박이다.

아들문제로 이회창대표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대선정국은 이처럼 약점잡기와 폭로전으로만 치닫고 있다.

정책과 비전은 찾아볼 수도 없다.

비유컨대 정규전은 없고 암습과 뒤통수를 치는 게릴라전만 있다.

여기엔 최소한의 예의도 교양도 없고 막가는 말이 난무한다.

자기의 장점과 정책을 자랑하고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약점과 치부를 들추는 일만 벌어진다.

자기 표 (票) 를 크게 하려는 적극적.긍정적 노력 대신 남의 표를 작게 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상대적 우세를 점하려는 부정적 방식이 주류가 되고있다.

대선정국이 정말 이렇게 굴러가도 괜찮은 것인가.

李대표 아들 문제처럼 객관적 사실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자. 그러나 근거도 없고 문제가 될 수도 없는 일을 적중하면 다행이고 빗나가도 본전이라는 식으로 의혹을 만들고 증폭시키는 것은 정치도의상으로도 사회건강을 위해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가령 姜총장의 말대로 야당 두 金총재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면 집권당이 발견한 당시엔 왜 덮어두었는가.

야당총재에게 문제가 있다면 바로 국익과도 관련되고 국민도 알아야 할 일인데 당시 덮어도 무방한 일이었다면 지금도 무방하다는 얘기고, 정말 덮어둘 수 없는 일이라면 발견 당시 덮었던 정부.여당부터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趙시장에게 '한방에 날릴 수 있는'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시장이 되기 전에 밝히는 것이 나라와 서울시를 위해 옳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때엔 趙시장을 서로 후보로 영입하려 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 "자료가 있다" 고 협박하는 것은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앞뒤가 안맞는 일인가.

한마디로 모두 한심하고 유치한 일들이다.

문제는 이런 한심하고 유치하고 나라와 사회에 손톱만큼도 득될게 없는 테마로 대선정국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후보가 상처투성이가 되고, 누가 대통령이 돼도 추악한 선거과정의 부담 때문에 온전한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이 나라 대통령에 '약점캐기 전문가' 가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많은 사람의 입에서 이대로 가면 국운이 암담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다음 5년엔 엄청나게 큰 일이 많고 그런 큰 일을 해내자면 큰 리더십이 나와야 할텐데 대선정국의 돌아가는 꼴을 보니 싹이 노랗다는 얘기다.

대선정국의 흐름을 바꾸어야겠다.

남을 깎아내리고 남의 표를 줄이는 정치가 아니라 내 장점을 돋보이게 하고 내 표를 크게 하는 정치로 나가야겠다.

뒤통수를 치고 발목을 잡는 비겁한 암습이 아니라 국사를 놓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정규전으로 나가야겠다.

며칠 전 클린턴 대통령은 "새로운 천년 (千年) 을 미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자" 며 21세기의 미국주도를 위한 17개의 상징적 행사를 발표했는데 우리도 새로운 천년까진 몰라도 우리 나름의 5년정도의 그림은 놓고 얘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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