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지룡의 일본속으로]3.힐링(healing)산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몇년 전부터 일본에선 원예상품.애완동물 같은 게 인기다.

애완동물과 관련상품 시장규모는 무려 연간 7조원을 넘어섰고 전자 애완동물 다마곳치 열풍은 익히 아는 바 그대로다.

또 지난해엔 부드러운 악장만을 모은 클래식 콤팩트디스크 (CD) '카라얀 아다지오' 가 레코드 판매순위 10위에 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모든 현상을 해석하는 키워드는 힐링 (healing) 이라는 개념이다.

영어로 병을 치료한다는 뜻이나 일본에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풍요롭기는 하지만 행복을 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 평생 쉴 틈없이 닥치는 스트레스, 익명성이 강조되는 대도시의 불안과 고독에 지친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는 것이 '힐링 상품' 이다.

이 유행은 마음의 상처, 이른바 트라우마 (trauma) 를 지닌 '어덜트 칠드런' 이 많다는 증거다.

〈본지 7월28일자 39면 참조〉 한 시대 전까지만 해도 여주인공은 별달리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캔디.샐리.오스칼 등 우리의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만화의 여주인공들도 있지만 그들은 전부 소녀용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이었다.

'아톰' 이나 '도전자 허리케인' 에는 여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징가 Z' '타이거 마스크' 에는 주인공 주위에 청순가련형의 여성이 등장하고 있으나 역시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개는 납치를 당하거나 적으로부터 도망칠 때 넘어지거나 부상을 당해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존재에 불과했다.

'람마 1/2' 로 대표되는 학원 로맨스 만화에서도 여주인공은 여전히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20~30대 남성이 여주인공에게 '힐링 효과' 를 원하기 시작하면서 여주인공의 성격이 1백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주인공 후지사키 시오리처럼 아직도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이 인기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보호와 헌신' 이라는 새로운 힐링 개념의 여주인공 인기는 가위 폭발적이다.

올 최대의 히트작은 3백10만개가 팔린 게임 '파이널 판타지' .여기에는 에어리스.티파.유피라는 세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대지를 뜻하는 단어 'earth' 에 'i' 를 추가해서 이름을 붙인 여성 에어리스 (Aerith) 는 대지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전투중 그녀가 맡은 임무는 공격이 아니라 같은 편의 치료다.

특히 죽은 동지를 살려내고 체력과 마력까지 회복시켜주는 그녀의 최후 마술 '생명의 고동' 은 감동적이다.

다른 여주인공 티파. 그녀는 단 한순간도 주인공 곁을 떠나지 않고 최후까지 함께 싸운다.

철저하게 헌신적인 인간형이다.

그러면서도 한 시대전의 이른바 내조형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녀는 공격형 인간이다.

때리기.던지기.돌려차기를 포함한 6연타 공격을 퍼부으며 주인공과 대등한 위치에서 적을 물리친다.

발랄하고 영악한 현대 여고생 같은 세번째 여주인공 유피가 남성들 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따뜻한 모성애와 공격적이고 헌신적인 동지의 개념을 동시에 포함한 여주인공은 바로 '에반게리온' 의 헤로인 아야나미 레이다.

탁월한 전투력으로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무기질적인 성격의 그녀는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에 대해 묘한 보호본능을 느낀다.

이것이 애정으로 바뀌는 과정은 남성 팬들을 사로잡기 충분해 보인다.

그녀가 캐릭터 상품의 모델로 활약 중인 것 또한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여주인공상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김지룡〈문화경제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