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의 권태 “범죄가 평범하니 인생도 평범하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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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13면

홈스 앞에 홈스 없고, 홈스 뒤에 홈스 없다고 했다. 말이 좀 지나친가. 하지만 셜록 홈스의 열성 팬 ‘셜로키언’들은 고개를 끄덕일 거다. 소설의 주인공이 마치 실존 인물과 같은 생명력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 아서 코넌 도일(1859~1930)이 창조한 홈스가 그렇다. 4개의 장편과 56개의 단편에 나온 홈스는 20세기 이후 영화·드라마의 단골손님이 됐다. 또 현대 작가의 손으로 계속 재창조되고 있다. 소싯적 홈스가 나오는 책이나 영화를 한 번쯤 안 본 사람이 있을까.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홈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8년의 『주홍색 연구』. 이어 1890년 『네 개의 서명』 이후 부동의 인기를 누렸다. 오스틴 프리맨, 에무스카 오르치, G K 체스터튼, 애거사 크리스티, 반 다인 등이 도일의 뒤를 이었다. 이로써 추리소설의 황금기, 명탐정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다.

19세기 탐정에게 지금도 팬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난해한 퍼즐 풀기보다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홈스의 인상은 선명하다. 키 1m83㎝의 호리호리한 몸매에 매부리코와 날카로운 눈, 그리고 파이프 담배. 성격은 침착·냉정하지만 현장으로 곧장 달려가는 혈기왕성한 행동파다. 여차하면 권투와 검술 실력을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탐정은 정신노동자라고 자부한다. 자연과학적 지식과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주홍색 연구』에서 홈스는 웟슨을 처음 보자마자 대번에 아프가니스탄 종군 경험을 알아맞힌다. 어리벙벙해 하는 웟슨에게 “탐정의 일이란 아주 엄정한 과학이며, 또 과학이어야 한다네”라며 기를 죽인다.

이렇게 홈스는 과학적 추리로 웟슨, 즉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이 심리분석을 장기로 삼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차이를 도일은 홈스의 입을 빌려 과시한다. “내 생각으론 뒤팽은 훨씬 더 인물이 떨어지네. …그 친구의 수법은 천박한 겉치레야.”

홈스는 탐미적 취향도 강하다. 지적·감성적 공허함을 마약으로 달랜다. 『네 개의 서명』의 처음과 끝은 모두 홈스의 마약 타령이다. 세기말의 퇴폐적 분위기가 풍긴다. 실제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 뒤에 깔린 권태감을 홈스의 등장 배경으로 보는 평론가도 있다. 홈스는 탄식한다. 세상은 왜 이리도 따분하냐며. “범죄가 평범하니 인생도 평범하지.”

애초부터 생계형 탐정이 아니었으니, 그가 다루는 사건도 범상치 않다. 살인에도 장식적이고 미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공포와는 확연히 다르다. 피비린내보다 감미로운 전율을 안겨준다. 그래서 현실감이 떨어진다는데, 어차피 소설은 현실이 아니지 않나.
“인생이라는 무색의 실타래엔 살인이라는 붉은 실이 섞여 감겨 있네. 이를 분리해 끝에서 끝까지 남김없이 폭로해 보이는 게 우리의 임무일세.” 그냥 ‘범인 잡으러 가자’고 하면 될 걸, 홈스는 한껏 멋을 부린다. 이런 게 당시 세기말적 감성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고색창연한 멋과 맛 또한 좋은 읽을거리다.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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