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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정치] 정치권은 지금 라디오와 ‘열애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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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20년 넘도록 하루를 운동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운동을 건너뛸 때가 있다. 라디오 인터뷰가 잡혀 있을 때 그렇다. 인터뷰가 있는 날이면 오전 5시 일어나 조간신문을 펼치고 2시간 동안 뉴스를 꼼꼼히 살핀다. 17일에도 그랬다. 이날은 김수환 추기경 선종과 관련해 “미움과 증오를 뛰어 넘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야당과 대화하겠다”고 말했다.

뉴미디어 시대다. 인터넷은 일상이고, IPTV가 화두다. 그러나 올드 미디어, 라디오의 생명력은 여전하다. 특히 정치인과 라디오의 관계는 특별하다. 최근 많은 정치인이 아침 라디오 시사프로를 통해 자신의 정견을 펼치고 있다. 바야흐로 라디오와 정치의 ‘마리아주(marriage·결혼)’라 할 만하다.

◆“여론 주도층이 듣는다”=현재 아침 출근시간대의 라디오 시사프로는 8개다. 이들 프로그램의 정치인 출연 비중이 절반가량이다. 1월 한 달간 MBC·KBS·SBS 3사 라디오의 아침 시사프로가 진행한 139건의 인터뷰 가운데 71명(51.0%)이 정치인이었다.

이슈가 생기면 유력 정치인들은 바로 라디오를 찾는다. 청와대의 ‘강호순 홍보 강화 e-메일’을 놓고 한나라당 공성진 최고위원과 민주당 서갑원 원내수석부대표가 각자의 주장을 펼쳤다. 박 대표는 이 가운데서도 단골손님이다. 매달 5~6차례 라디오에 나온다. 잦은 라디오 출연에 대해 박 대표는 “출근길의 중요한 여론 주도층이 듣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다.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제작하는 한재희 PD는 “청취율이 높고, 그 시간대 광고 판매단가도 비싸다”며 “유력 정치인이 출연하면 청취율 이상의 영향력을 만들 수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아쉽지만 발전한 모습”=SBS 라디오의 아침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경희대 김민전 교수는 정치학자다. 불교방송(BBS)의 김재원 진행자는 17대 국회의원을 지내 정치권의 생리에 정통하다. 두 전문가가 인터뷰를 통해 느낀 정치권의 현주소는 “나쁘지 않다”다. 두 사람 모두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자신의 얘기를 하려는 정치인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과거 청와대나 당 지도부의 눈치를 살피던 것에 비해 소신을 주장하는 분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지난해 종합부동산세를 놓고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와 임태희 정책위의장, 원내 쌍두마차가 라디오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에 대해 “대화를 통해 이견을 조율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 된다”며 “라디오 출연을 일일이 허락받지 않을 뿐더러 ‘이런 식으로 얘기하라’는 등의 방침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라디오 정치’의 부작용도 지적한다. 연세대 김기정 (정치학) 교수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체감 만족도가 떨어지는 상태에서 정치인 개인의 목소리를 크게 내 정치혐오를 깊게 하는 측면이 있다”며 “프로그램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싸움을 붙여 정쟁으로 비화하는 제작 측의 행태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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