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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 Report] 금리 아무리 내려도 돈은 안 도는 악순환 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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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유동성 함정은 자주 생기지 않는다. 대공황이나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그 예다. 그러나 경제가 일단 유동성 함정에 빠지고 나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일본은 적어도 12년 걸렸다. 또 유동성 함정에 디플레(물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상황)까지 겹치면 그 둘 사이에 악순환 고리가 고착될 위험이 커진다. 경기를 살리겠다고 금리를 낮춘 게 오히려 경기 회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유동성 함정을 무척 경계하게 된다.

유동성 함정이란 아무리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고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금리를 0%까지 낮추어도 풀린 돈이 가계 소비나 기업 투자에 쓰이지 않고 단기금융상품 시장에서 맴돈다. 그만큼 (물가 하락이 예상되어) 경제 주체들이 지금 돈을 쓰는 것보다는 현금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 (경기 침체로 인한) 손실이 더 클 수 있다고 불안해 하는 것이다.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 가계는 (물가가 떨어질 정도로 불황의 골이 더 깊어지는 때에) 지금의 일자리나 소득을 나중에도 유지할 수 있을지부터 걱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기본적인 생활비 외에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게 된다.

기업은 기업대로, 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질 정도로 경제가 좋지 않은 때가 되면, 몇 년 앞을 보는 투자를 꾀하기보다는 당장 살아남기 위해 골몰하게 된다. 인건비 등 한 달 한 달 연명하는 데에 급급해져, 돈을 꿀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투자는 엄두도 낼 수 없게 된다.

금융기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금융당국이 (기업들이 돈 꾸기 좋게) 금리를 내리고 (기업한테 대출 많이 하라고) 금융기관에 자금을 대주어도, 경기 침체로 부실채권이 얼마나 늘어날지, 그래서 금융기관 자체가 얼마나 부실해질지, 그 결과 공적자금 투입을 언제 강요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기존 대출의 연장조차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 극도의 불안심리 때문에 아무리 돈값이 싸도 돈이 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일까? 적어도 현상만으로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금리를 내려도 돈은 금융권 안에서만 떠돌고 있고 경기 불황 색은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동성 함정의 시비를 가릴 정도로 병세가 심각하게 진행된 것 같지 않다. ‘성격’으로는 유동성 함정적(的)이지만 ‘정도’로는 아직은 아니라는 얘기다. (금융당국은, 기준금리가 제로 퍼센트까지 내려가지 않아서 인하 여력이 있고, 또 기준금리 인하에 따라 단기금리가 따라 내려가는 점을 들어, 유동성 함정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한번 믿어 보자.)

◆대응책은 널려 있다

대공황 이후, 특히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유동성 함정 때 써먹을 만한 여러 가지 대응책이 제시되고 연구되고 실험까지 거쳤다. 메뉴는 다양하게 이미 나와 있으니, ‘상황에 맞는, 원인 치유에 적절한 걸 골라, 필요한 강도로’ 써먹으면 된다는 얘기다.

정책금리가 0%라고 해서, 동원할 수 있는 금융정책 수단이 다 없어진 건 아니다. 통화당국이 직접 통화량 공급에 나서면 된다. 돈 값을 낮추어 돈을 쓰게 하려는 정책(금리인하)이 통하지 않으면 금융통화당국이 (이래저래 대출활동이 극도로 위축된)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민간경제에 통화를 직접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다(돈 가뭄이 극심한 대공황 때에, 케인스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돈을 민간에 직접 풀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중앙은행이나 재무부 등이 국채를 사들이고 그것으로 안 되면 회사채를 사들이라는 얘기다. 그럼 적어도 돈 필요한(그러나 은행에서는 돈을 꿔주려 하지 않는) 기업들이 돈을 구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글로벌 경제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는, 민간에 돈을 푼다고 해서, 그게 소비와 투자 회복으로 이어지긴 힘들다. 이러한 때에 효험이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정책이 바로 재정지출 확대다. 국내외 안팎의 극심한 불황(즉, 내수와 해외시장의 불경기) 때문에 지출 수요가 극도로 줄어들어, 경제의 공급 능력에 한참 모자라는 부분을 정부 재정지출로 채워넣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민간 경기를 촉발하지 않겠냐는 얘기다.

또 가끔 거론되는 것이 외환시장에 개입해(또는, 통화가치 하락을 용인해) 통화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것이다. 한 쪽으로는 수출이 늘어나고, 다른 쪽으로는 수입물가 상승으로 물가상승 기대심리를 조장해 현재의 소비를 유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안정심리 회복이 관건

지금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모든 정책의 초점을, ‘경제가 곧 바닥을 칠 것이고 가까운 장래에 경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신뢰를 되살리는 데에 모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은 글로벌 경제의 불안과 불황에서 연유되었다. 따라서 장래에 대한 신뢰 회복의 시발점도 또 종착점도 글로벌 경기안정에 있다. 글로벌 공조 분위기 속에서 세계 각국이 벌이고 있는 경기 안정과 금융안정책이 하루빨리 그 효험이 발휘되도록 ‘기원’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글로벌 불황이 야기한) 국내 불황이 더 깊은 침체를 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 정책은 (적어도 글로벌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표징이 드러날 때까지는) 불황 심화의 속도를 줄이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글로벌 경제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해, (재정지출 확대이든, 금리의 추가인하이든, 통화량 확대이든) 우리가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책수단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집행하는 데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유동성 함정 같은 한가한 논쟁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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