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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유래]서초구 내곡동 …陵자리로 각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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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에서 성남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서초구내곡동 (內谷洞) 의 동명은 '안골' '안말' 의 한자식 표기. 구룡산.대모산과 성남시가 갈리는 인능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에 자리잡은 탓에 본촌의 안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때 행정구역상 이름은 광주군언주면내곡동으로 일제때 내곡리가 되었다가 지난 63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구역확장때 서울시로 편입됐다.

이곳은 대모산등의 산세가 좋은 길지 (吉地) 인데다 서울로부터 대략 45리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조선때에는 릉 (陵) 자리로 각광을 받았다.

현재 내곡동13의1에는 사적 제194호로 지정된 헌인릉 (獻仁陵) 이 있는데 이는 3대 태종과 비 (妃) 원경왕후 (元敬王后) 를 모신 헌릉과 23대 순조와 순원 (純元) 왕후를 모신 인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 이곳에 첫번째로 생긴 헌릉은 능역의 넓이만 41만여평에 달하는 쌍봉릉으로 세종2년 (1420) 7월10일 수강궁 (壽康宮 : 창경궁)에서 승하한 원경왕후를 모시기 위해 그해 9월17일 조성됐다.

요즘 인기 사극 '용의 눈물' 에서 남편의 등극을 위해 활약이 한창인 정안대군의 부인 민씨로 그려지고 있기도 한 원경왕후는 태종보다 2년 앞선 1365년 송경철동 (松京鐵洞)에서 탄생했다.

태조 즉위후 정녕옹주 (靖寧翁主) 로, 정종때 정빈 (貞嬪).정비 (靖妃) 로 각각 책봉됐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에 봉해졌던 희대의 여장부다.

하지만 이같은 그녀의 극성 (?) 이 타고난 불같은 질투와 함께 화근이 돼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으로부터 공신이기도 한 동생 민무구.무질형제가 죽음을 당하는등 비극을 겪기도 했다.

헌릉의 바깥주인인 태종은 태조의 5남으로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나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두차례의 '왕자의 난' 을 거쳐 1400년 등극해 다소 엇갈리는 평가를 받기도하는 인물. 하지만 재위기간중 신문고 설치등 선정을 베풀면서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치적을 쌓은 뒤 왕위를 물려줘 세종때 중흥의 바탕을 마련했다.

태종은 이후 4년간 상왕으로 있으면서 형인 태상왕 (정종) 과 세종과 함께 살곶이벌에서 사냥등으로 유유자적하다 왕비보다 2년 늦은 세종 4년 (1422년) 천달방 (泉達坊) 신궁에서 훙거 (薨去) 해 왕후옆에 묻혔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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