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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정치] 국회 ‘필리버스터 추억’ 재현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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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말 많은 국회의원들도 두려워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전자 자동 타이머’입니다. 국회에서 발언 제한 시간이 지나면 종료 신호와 함께 마이크가 꺼지기 때문입니다. TV로 생중계되는 장면을 보다 보면 종종 의원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는 민망한 상황이 생기곤 합니다. 교섭단체 대표 연설(40분), 대정부 질문(20분)이 아니면 웬만한 질의나 토론 발언은 15분 이내에 끝내야 합니다. 이런 제한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닙니다.

#1. 1969년 8월 29일 밤 법제사법위원회.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법안에 대해 박한상 전 의원이 마지막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다음날 오전에야 끝이 납니다. 총 발언 시간은 10시간5분. 교대한 속기사만 60여 명에 달했습니다. 박 전 의원은 발언 중에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전날부터 국도 먹지 않았습니다.(국회보 2001년 8월호)

#2. “(1964년 4월 20일) 남편은 의사진행발언권을 얻어 한·일 국교수립 과정의 잘못된 점과 (한·일 수교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동의안이 제출된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 국정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저녁 8시까지 김대중 의원의 발언이 계속되자 이효상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했다. 이날 원고 없이 5시간19분 동안 계속된 그의 발언은….”(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그렇습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의사 진행 방해)’입니다.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filibustero)에서 유래한 필리버스터는 국회에서 소수파 의원들이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필요에 따라 의사 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7대 국회에서 의사진행 발언을 제한하는 국회법이 제정되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런 필리버스터가 어쩌면 2009년 국회에서 재현될지 모릅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지난 11일 비공개 당 회의에서 “상임위 필리버스터 활용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쟁점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민주당이 제시하는 근거는 “위원은 (각종)위원회에서 동일 의제에 대해 횟수와 시간 제한 없이 발언할 수 있다”는 국회법 60조 1항입니다. 물론 발언을 원하는 위원이 2명 이상일 때 위원장이 15분 한도로 각 위원의 첫 번째 발언 시간을 균등하게 정해야 한다는 제한(60조2항)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결국 두 번째 발언부터는 제한이 없는 셈”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필리버스터가 과하면 꼭 필요한 법안 처리가 지연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특히 일단 상임위에 법안이 상정된 뒤에나 필리버스터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견제의 목소리도 한나라당에선 나옵니다. 쟁점 법안의 상정 자체를 막아선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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