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새 변수 ‘원외 거물들’ 손학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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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거처는 춘천 시내에서 차로 30분은 더 가야 하는 산골에 자리 잡고 있다. ‘간첩 잡아 애국하고 유신으로 번영하자’는 구호가 적힌 1970년대 비석이 남아 있을 만큼 시간조차 비켜간 오지다.

지난해 1월 대선 패배로 구심점을 잃은 야당에 구원투수(대표)로 등판해 야권 통합을 성사시키고 총선을 지휘했던 손학규(62·사진) 전 민주당 대표. 그는 지난해 7·6 전당대회 직후 “제 자신을 벌거벗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며 6개월 만에 대표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두 달 뒤 춘천 외곽의 대룡산(大龍山) 아래 거두리(擧頭里·큰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모양이라고 해 붙여진 이름)의 한 농가에 들어가 6개월째 칩거해 왔다.

그런 손 전 대표가 지난 9일 빈민활동 동지였던 고 제정구 전 의원의 추모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나는 유배 중이며 자숙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회에서 손학규가 필요한 사람인지 다시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떠돌던 4·29 재·보선 출마설은 쑥 들어갔다.

손 전 대표는 요즘 자신을 찾아오는 지인들에게도 “의원 한 번 더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언제’보다는 ‘어떻게’돌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말도 자주 쓴다. 논어의 ‘고지학자위기(古之學者爲己), 금지학자위인(今之學者爲人)’의 압축어로 ‘학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수양을 위해 하는 것’이란 뜻이다.

손 전 대표의 ‘산중모색’이 길어지는 건 불투명한 상황과도 관계 있다. 당 대표 시절 어렵사리 모았던 ‘손학규계’는 벌써 당내에 흔적을 찾기 어렵다. “더 이상 그를 위한 공간이 없다”(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다. 라이벌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처럼 외곽조직이 탄탄하지도 못하다. 보건복지부 장관·경기도지사 시절 쌓은 ‘유능’ 이미지도 한나라당 탈당과 민주당 대표를 거치며 많이 희석됐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손 전 대표는 “조직이나 이미지 챙기기보다는 ‘통합’을 화두로 가치와 비전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이라고 측근들은 전한다. 이에 따라 그의 칩거는 최소한 몇 개월 더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강훈식 지역위원장(충남 아산)은 “손 전 대표는 자신을 향한 비판과 정치 여건을 정확히 알고 있다”며 “자신을 따른 이들을 챙기기 앞서 손학규만의 가치를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대룡산을 오르내리고 독서로 소일하며 구상을 메모하는 게 일과였던 그였지만 요즘엔 눈에 띄지 않게 세상과의 소통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 매일 아침 차로 왕복 40분 거리인 춘천 시내에 나가 사오는 3~4부의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최근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연설문과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탐독하고 있다. 설 연휴 직전엔 지역구인 서울 종로의 재래시장 상인들과 만났고 지난 13일엔 강원도 태백의 가뭄 현장을 찾았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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