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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방 못 사는 우울함 주머니에 담아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1호 11면

1~3 패션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는 핸드백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4~6 패션쇼 런웨이에서 잇백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야 할 모델들이 핸드백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장하는 게 불황기 패션의 특징이다.

‘얇아진 지갑 탓에 멋진 새 가방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도 덕분에 두 손은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손 둘 데가 없으니 어쩐지 불안하다. 마침 바지 주머니가 생각났다. 손을 찔러 넣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잇백(It Bag)’ 대신하는 ‘포켓’

‘잇백(It Bag)’이 사라진 2009년 스타일의 묘사다. 잇백은 1990년대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펜디가 히트친, 소위 ‘대박 가방’이 등장하면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 사는 여성이든, 패션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이 브랜드의 ‘그 가방(it bag)’을 사고 싶어하던 데서 잇백이란 말이 유래됐다. ‘이번 시즌엔 반드시 이 가방(it bag) 하나 들고 다녀야 패션 리더’라면서 소비자를 유혹하는 마케팅 용어다.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30년대 애용했던 ‘켈리 백’, 프랑스 빵 바게트를 닮은 펜디의 ‘바게트 백’은 90년대 들어 패션 리더들의 필수품이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잇백이 가고 주머니 패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잇백은 왜 사라졌을까. 주머니 패션은 또 뭘까.

1990년대 잇백은 켈리 백
21세기 들어서도 잇백의 인기는 계속됐다. 명품업체마다 봄·여름, 가을·겨울 두 차례씩 신상품을 소개할 때마다 “이것이 바로 잇백”이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여성들은 그런 명품 가방에 열광했다. 에르메스·펜디·루이뷔통처럼 의상보다 가방이 더 유명한 브랜드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돌체&가바나처럼 본래 의류가 주력인 브랜드 역시 패션쇼에서 수십 개의 가방 디자인을 소개할 만큼 여기에 공을 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방은 두 가지 이유에서 명품 브랜드의 효자 종목이다. 의류처럼 같은 디자인에서 체형별로 사이즈를 다르게 할 필요가 없어 재고 관리가 수월한 것이 첫째 이유다. 둘째는 명품 브랜드 대중화의 첨병이 돼 매출 신장에 크게 기여한 점이다. 대개 명품 브랜드에서 재킷 등 의류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게 보통이다. 이에 비하면 천으로 만든 30만원대 가방은 아무나 살 수 없던 명품을 누구나 살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어 매출 급증에 일조했다. 초기엔 한두 개에 불과하던 잇백이 브랜드마다, 시즌마다 쏟아져 나와 소비자들이 잇백 자체에 싫증을 낼 무렵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파고가 덮쳤다. 뉴욕의 럭셔리 인스티튜트도 최근 보고서에서 “명품의 저변을 넓히고 잇백 열풍을 지탱해줬던 대중이 먼저 지갑을 닫자 잇백에 대한 열기가 식고 있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 찌른 밥 딜런
잇백 대신 새로운 패션 트렌드가 된 것이 주머니다. 가방이 없으니 대신 옷에 달린 주머니가 물건을 넣을 가방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패션잡지 ‘보그’ 영국판의 해리엇 퀵 기자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으면 천하태평, 정말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실용적인 필요에 심리적인 이유까지 덧붙여졌다. “불황에 위축된 마음, 가방을 살 수 없는 우울함, 파티장에서 한 손에 음료수를 들고 서서 어쩌지 못하는 반대편 손의 불편함까지 주머니 하나가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뉴욕·밀라노·파리 등에서 열린 올해 봄·여름 패션쇼에선 주머니를 강조한 작품이 많이 등장했다. 돌체&가바나의 캐주얼 라인인 D&G도 20대 초반 여성을 타깃으로 한 투피스에 여기저기 주머니 장식을 달았다. 패션쇼 모델들도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채 런웨이를 걸었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는 우아한 롱 드레스에 주머니를 달아 내놨다.

의상 사진을 직접 찍는 라거펠트는 시즌 컨셉트를 설명하는 사진에 ‘주머니에 손 넣은 모델’을 여럿 등장시켰다. 영국 패션박물관의 큐레이터인 바버라 버만은 가디언에 주머니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주머니는 이 세상의 크기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사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세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등에 대해 아주 예민하고 감각적인 척도가 바로 주머니다. 가수 밥 딜런은 앨범 재킷에서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난 내 길을 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란 걸 표현했다. 조지 W 부시는 비슷한 차림새로 딜런처럼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모양새였다. 단지 옷일 뿐이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바는 굉장히 다양하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싶을 때쯤 세계 경제가 회복될까. 주머니를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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