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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유래]중구 명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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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근년들어 그 중심이 강남쪽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번화가의 대명사는 역시 명동 (明洞) 이다.

조선초 한성의 행정구역 설정 당시 남부명례방 (明禮坊) 지역으로 명례방 또는 '명례방골' 이라 불리던데서 첫자를 따 붙여진 이름이다.

공식적인 행정단위명으로 쓰인 것은 갑오개혁 (1894)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남서명례방명동계명동 (南署明禮坊明洞契明洞) 이 처음. 지금의 화려함과는 달리 명동은 조선때 '문안' 에 해당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발전되지 못한채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였다.

당시에는 모든게 궁궐과 종로 중심인데다 남산의 북쪽 기슭 도심으로 가려면 청계천을 건너야하는 지리적 핸디캡때문이었다.

사적 제258호 명동성당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명동2가에 속하는데 이곳의 원래 이름은 북달재. 조선초 간고 (諫鼓) 를 달아놓고 억울한 사정이나 조정에 알릴 일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북을 치고 하소연하도록 한데서 붙여졌다.

임진왜란때 명장 양호 (楊鎬)가 이곳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걸려있던 종을 가져와 달은 이후로는 종현 (鐘峴) 이라 불렸다.

해서 한동안 명동성당은 종현성당이란 별칭으로 통하기도 했다.

명동에서도 가장 노른 자위인 중국대사관자리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당시 포도대장이었던 이경하 (李景夏)가 살던 집으로 갑신정변때 조대비와 명성황후, 세자 (나중에 순종) 등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대원군이 청의 보정부 (保定府) 로 납치된뒤 청군의 총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했는데 대총통이 원세개 (袁世凱) 여서 본진이 있던 충무로입구~명동.을지로입구까지를 원대진전 (袁大陳前) 이라 불렀다.

명동이 발전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남대문과 충무로 일대에 상권을 형성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상품시장에 한국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거의 뒷골목이나 다름없던 퇴계로를 '신작로' 로 확대하면서 가장 가까운 이곳이 서서히 상업지구로 발돋움했다.

30년대말부터 명동은 이미 근대적인 도시풍을 갖춰 저마다 빛깔과 분위기를 가진 그릴과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당시 '명치정 (明治町) 의 명물' 로 꼽히던 ▶보아그랑의 정식▶가네보의 양식▶가와조의 장어덮밥▶에도가와의 스끼야끼도 이때 등장했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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