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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3040 기대주 ③ 개념미술가 데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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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데비한(40·사진)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역주행’한 작가다. 11세 때 이민가 34세에 돌아왔다. 1년 뒤 아예 미국의 교수직을 정리하고 한국에 눌러앉았다.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너도나도 미국·유럽으로 나가는 형편이라 ‘미쳤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정작 그는 확고했다. “의식 구조의 서구화, 전통과 현실의 조화를 이뤄야 하는 아시아의 숙제에 관심이 있어서”였다. 계기는 비너스상이었다. 2004년, ‘미대 입시의 메카’라 불리던 서울 홍익대 앞에서 지내던 그는 학원 창문마다 똑같이 그린 석고상이 가득 붙어 있는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세기에 일본이 프랑스로부터 수입한 아카데미즘의 잔재가 21세기 서울 한복판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미술대학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꼭 통과해야 할 높은 장벽으로.

그래서 1년여의 한국 생활을 마치면서 연 국내 첫 개인전(2004년)에는 미대 입시생들이 저마다 수백 개쯤은 사용할 지우개 가루를 일일이 종이에 붙여 비너스상, 아그리파상을 만든 ‘지우개 드로잉’ 연작을 내놓았다. 한 남학교의 졸업사진 얼굴을 전부 아그리파의 얼굴로 바꿔 놓은 디지털 사진 ‘아그리파의 교실’도 미술계에 충격을 줬다.

◆한국 비판의 상징 ‘비너스’=획일적 미술 교육을 고발하며 시작된 그의 비너스 탐구는 ‘미의 척도’에 대한 의심으로 확장됐다. 대표작 ‘여신들’ 시리즈는 평범한 한국 여성의 몸을 찍은 뒤 서구미의 대표 주자인 비너스의 얼굴과 합쳐 디지털 작업을 통해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바꾼 것이다. 8등신이 안 되는 그의 여신들은 서로 팔짱끼고 활보하고, 수줍게 입을 가리고 웃는다. 한국 여성들 고유 행동의 관찰기이자 실체와 이상, 과거와 현재, 동서양이 교감하는 현시대의 모습이다.

데비한이 2008년 발표한 디지털 사진 ‘비밀스러운 삼미신’(120×185㎝)은 우리나라 일반 여성들의 누드를 촬영한 뒤 비너스·아리아스 등 고대 그리스 조각의 두상을 결합한 뒤 조각 이미지로 바꿨다. 여자끼리 팔짱 끼고 소곤소곤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포즈는 한국적이다. [데비한 제공]


비너스 비틀기는 사진에서 공예와 조각으로, 젊은 한국 여성들의 몸에서 중장년 여성과 임산부, 신체 절제 수술을 한 여성들로 확장 중이다. 데비한은 일주일의 반은 이 같은 사진 작업을 하고, 나머지 반은 경기도 이천의 도예 가마에서 보낸다. 째진 눈의 동양인 비너스상, 두툼한 입술의 아랍인 비너스상을 빚는다. 3년간 붙잡은 청자 비너스 ‘미의 조건’에 이어 백자 비너스, 나전칠기 비너스도 내놓고 있다.

◆“나를 개념미술가로 불러달라”=이 때문에 데비한은 ‘사진가’라는 분류를 거부한다. 매체를 가리지 않는 만큼 ‘개념미술가’로 불러달라고 한다. 이 같은 성격을 잘 드러내는 작업은 ‘식(食)과 색(色)’ 연작이다. 한국·일본·독일 등지에서 일반 여성을 섭외, 그 나라 음식으로 치장하고 사진을 찍었다. 고춧가루 바른 입술을 육감적으로 내민 한국인 교사, 벗은 몸에 어묵을 목걸이처럼 두른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등이 등장한다. “여성의 관능미가 음식처럼 소비되는 광고 사진을 패러디해 평범한 여성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프로젝트”라는 설명이다.

전시장의 호평과 달리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해서 2007년에야 비로소 제 평가를 받았다. 현재 데비한의 ‘여신들’ 사진은 1300만∼1500만원 선이다. 같은 해에 그는 ‘청자 비너스’ 시리즈로 뉴욕의 국제 미술재단인 ‘폴록 크래스너 재단’의 기금을 따냈다. 올해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미술관에서 열리는 사진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스위스 바젤에서 10번째 개인전을 연다.

권근영 기자

◆데비한=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11세 때 미국으로 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UCLA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의 프렛 인스티튜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34세 때 국내 미술관의 해외 작가 창작 스튜디오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돼 돌아온 것을 계기로 한국에 눌러앉았다. 스페인 발렌시아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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