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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구보씨의사람구경>3. 가수 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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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누구누구는 정말로 노래를 잘 하는 가수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구보씨는 이렇게 반문하고는 한다.“그것도 말이라고 하나? 가수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거의 없다.매사가 마찬가지라우.소설을 잘 쓰는 소설가,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화가,영화를 정말 잘 만드는 영화감독 등등의 말들도 있지 않수? 물론 진짜 가수가 거의 없는 것 처럼 진짜 배우,진짜 소설가,진짜 화가,진짜 영화감독도 거의 없다.

어디 예술가들뿐이랴.이 세상에는 진짜 아버지도,진짜 어머니도,진짜 선생님도,진짜 제자도,진짜 아들·딸도 거의 없다.그것뿐만이 아니다.이 세상에는 진짜 택시기사도,진짜 우체부도,진짜 술집 주인도,진짜 슈퍼마켓 종업원도 거의 없다.진짜 공무원도,진짜 국회의원도,진짜 장관도,심지어 진짜 대통령도 없는 것 같다.새로운 대통령을 뽑는다고 야단법석인 것 같은데 진짜 대통령 후보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왜 이러지?아무도 진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가짜가 아닐까? 나조차 진짜 내가 아닌지 모르지,빌어먹을.확실히 사이버 시대인가 봐.공간도 가짜 공간이 있다잖아.

구보씨는 그렇게 버릇처럼 투덜거리다가는 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다지도 많은 것들을 가짜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 진짜라는 것이 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거의 예외없이 어쩌다가 하나 나타나는 그 진짜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이 가짜로 폄하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그 진짜를 가짜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말이다.더 많은 사람이 진짜 삶을 살게 되는 길은 그 길뿐인 것 같다.궤변 같고 농담 같지만 이 험한 세상을 서른 하고도 다섯살이나 먹도록 살다보니 이런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아무튼, 각설하고, 리아는 정말 노래를 잘 하는 가수다. 리아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스무살쯤 되었다는데도 여전히 꼬마같은 여자가수가 어느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나와서 팝송 몇개를 부르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때만 해도 구보씨는 그녀의 노래가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었다.

"다른 가수들 흉내를 좀 낼 줄 아는 것 가지고 노래를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잖아. "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 좀 할 줄 안다는 표를 내기 위해 외국 가수들의 흉내를 내는 가짜 가수들이 꽤 있지 않은가.

정작 자기는 노래를 할 줄 모르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구보씨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그 리아라는 소위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가 처음 음반을 냈다며 틀어주는 노래를 하나 듣게 되었는데, 도저히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그 희한한 발성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래 저건 아니야. 이상한 흉내내기야. 가슴을 때리지 못하잖아. 모름지기 노래란 가슴을 때려서 영혼이 날아오르게 만들어 줘야지. 구보씨는 나이 탓인지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벌써 그렇다.

가슴.영혼 운운한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 구보씨는 그 리아라는 이상한 이름의 가수가 라이브에 유독 자신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하여 동숭동의 어느 공연장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라이브 콘서트를 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이상한 이름 때문인지, 그 소녀에 관한 소식이 자꾸 구보씨의 귓전을 스치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예명을 참 잘 지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이미 많이 유명해져 있거나 둘 중 하나리라. 그러다가 또 다른 어느 날, 드디어 구보씨는 리아라는 그 이상한 이름의 꼬마 여가수가 공연을 하는 라이브극장이라는 곳까지 가게 되었고, 마침내 그녀로부터 가슴을 세게 얻어맞고 영혼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변을 당하게 된 것이었던 것이다.

"아, 리아는 정말 노래를 잘 하는 가수구나. " 구보씨는 대체로 자기보다 열댓살 이상은 어린, 리아의 팬들로 가득찬 공연장 한 구석에 마치 교외지도를 나온 근엄한 지도교사처럼 폼잡고 앉아 있다가, 구보씨를 뺀 나머지들은 다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고 목이 빠져나가도록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는데, 얼빠진 채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의 통증을 진정시키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구보씨의 속사정도 모르고 리아는 노래가 하나 끝날 때마다, 초대권 받아가지고 공짜로 들어온 사람이 문제라고, 무슨 사장님처럼 떡 버티고 앉아서 헤드뱅잉 (머리 흔드는 것) 도 하지 않는다고, 그런 불량한 태도가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고, 마치 구보씨보고 들으라는 듯이, 아니 분명히 구보씨에게 대놓고 비난을 해대는 것이었다.

가슴을 얻어맞아서 영혼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날의 공연을 존 레넌의 '이매진' (Imagine) 으로 시작해 조용필의 제목을 알 수 없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자는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끝냈는데, 그 사이에 자기의 첫 앨범 '나의 웃기는 일기' 에 실려있다는 '유토피아' '네가지 하고 싶은 말' '집착' '욕구불만' '개성' '복장불량' 등의 노래와 앨러니스 모리셋과 크랜베리스의 노래를 하나씩 불렀던 것 같다.

구보씨가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가수는 이미자와 김추자다.

두 가수 모두 구보씨의 유년 내지 소년시절의 가수여서 그 가수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구보씨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왜 어머니가 이미자를 좋아하는지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지, 왜 나이 많은 누이들이 김추자에 열광하는지 왜 그녀의 춤을 따라 추는지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이미자는 슬픔으로 김추자는 관능의 힘으로 삶에 깃들어 있는 진실을 문득 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가슴을 때리는 순간이 있었고, 영혼이 어디론가 날아올랐었다.

리아는 구보씨의 가슴을 때린 세번째 가수인 셈이다.

그녀는 이미자처럼 슬프지도 않고 김추자처럼 관능적이지도 않다.

매우 힘이 세다는 면에서는 김추자 쪽에 가까운데 전혀 관능적이지 않다.

아직까지 에로틱한 사랑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꼬마 같다.

구보 : 공짜로 들어가서 헤드뱅잉도 못하고 사장님처럼 앉아있어서 정말 미안했다.

사람 : 그런 사람은 안 왔으면 좋겠다.

구보 : 나도 다시는 그런 자리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각설하고, 요즘 여자가수들은 음반을 내기도 힘이 든다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사람 : 대중음악 소비층이 소위 오빠부대들이라 그럴 거다. 물론 데뷔하는데 힘이 들었다.

여기저기 많이 기웃댔다. 방송국에서 시간 때워주느라 노래도 불렀고, 선배가수들의 라이브 콘서트장에 게스트로도 많이 돌아다녔다.

구보 : 요즘 양파라는 동년배 가수와 많이 비교되곤 하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 : 잘 한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서 혼자 곱게 노래를 한 것 같다.

구보 : 그녀는 화초류고 자신은 잡초류라는 얘긴가? 사람 : 나는 바닥으로 많이 돌아다닌 편이다.

그러나 여자 보컬을 받아주는 팀이 없었다.

악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파워도 떨어져서 그런지. 구보 : 파워는 안 떨어지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있는가? 특히 발성법이 특이하던데, 어디서 배웠나?

사람 : 배운 적 없다. 혼자 책을 보거나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해보거나 하며 터득했다.

구보 : 제대로 된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사람 : 모르겠다. 계속 공부해볼 생각이다.

구보 : 친하게 지내거나 선망하는 아티스트는?

사람 : 시나위.넥스트와 친하다. 그리고 가장 선망하는 사람은 서태지와 레니 크래비츠다.

구보 :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생각은?

사람 : 예술이다.

구보 : 엔터테인먼트 아닌가?

사람 : 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구보 :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건 옛날에나 그랬다.

사람 : 나는 옛날이 좋다. 옛날이 나쁜가?

구보 : 할 말이 없다.

사람 : 나는 라이브를 못하면 다 가짜라고 생각한다.

구보 : 노래 좀 할 줄 안다고 횡포를 부리는 것 아닌가. 난 생각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은 엔터테인먼트이고, 그래서 립싱크를 하며 춤을 추는 요즘의 댄스그룹들도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 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남들을 즐겁게 해주는 대가로 돈과 명성을 얻는 게 대중문화 사업 아닌가.

요즘 립싱크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은 부당하다.

그토록 격렬한 춤을 추면서 어떻게 노래를 부르란 말인가. 골탕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사람 : 그들은 엔터테인먼트를 하는 것이고, 나는 예술을 한다. 라이브로 한다.

구보 : 당신을 흔히 록가수라고 한다. 첫 앨범도 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계속 그럴 건가.

사람 : 다른 장르의 음악도 좋아한다. 사실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록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구보 : 록이 뭐라고 생각하나?

사람 : 저항하는 자유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구보 : 록만 그런가? 요즘 들어 소위 록가수들이 자유와 저항을 지나치게 주장하며, 마치 그런 가치들이 록이라는 장르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건 보기에 좋지 않다.

사람 : 가식으로 록을 하는 사람도 많다고 본다.

구보 : 당신은 록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

사람 : 억압적인 사회와 획일화하려는 교육에 대해 불평불만으로 저항할 것이다.

인간적인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래할 것이다.

며칠 후, 구보씨는 무리한 공연으로 그녀의 성대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별일이 아니기를.

<리아 프로필>

▶77년 서울생 ▶83년부터 5년간 탐험가이자 사진작가인 아버지를 따라 인도와 네팔에서 지냄 ▶서울 동명여고 졸업 ▶고1때 라디오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 노래자랑 출연 ▶올 5월에 1집 앨범 'My Funny Diary' 발표

<주인석>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

95년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연작소설 발표. 최근 '소설가 구보씨의 영화구경' 펴냄.

주인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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