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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거나 ‘찌질’하거나 … 왜 ‘극단남’ 뜰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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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변우민(右)과 김서형.변우민은 파렴치한 불륜을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 어눌한 캐릭터로 여성 시청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SBS 제공]

 “준표에게 멱살 잡히고 싶은 누님이 많은 걸로 봐선 확실히 네가 대세다 준표야”(‘10 아시아’ 게시판 ID 제비). “교빈씨 앞날이 캄캄합니다.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꼭 제 동생과 똑같네요”(‘아내의 유혹’ 게시판 ID sumta2365).

요즘 안방 시청자 마음을 달구고 있는 양대 막장 드라마 ‘아내의 유혹’(SBS·이하 ‘아유’)과 ‘꽃보다 남자’(KBS2·이하 ‘꽃남’). 비현실적인 설정·전개 탓에 각각 ‘명품 막드’ ‘고교 막드’라는 비아냥을 사지만 TNS 미디어코리아가 조사한 시청률은 각기 최고 40.4%(1월 29일), 31.5%(2월 9일)를 달린다. 프로그램 관련 게시판에는 드라마의 여주인공보다 남주인공에 대한 품평이 주를 이룬다. 천하에 없는 ‘찌질’한 남편과 천상에 있을 법한 까칠한 재벌 2세 등 극단의 남성상이 흥행 코드로 기능하는 셈이다.

◆남편은 ‘찌질’, 연인은 까칠=‘아유’에서 정교빈(변우민 분)은 파렴치한 불륜 남편이지만 독하기보다 어눌하다. 복수를 위해 위장 접근한 전처 은재(장서희 분)를 꿰뚫어보긴 커녕 “그렇게 잘나고 멋진 여자가 왜 하필 나 같은 유부남을…? 내가 그렇게 멋지게 생겼나?” 하고 반색하는 식이다. 여자의 유혹엔 백이면 백 넘어가 ‘갈대 교빈’으로 불린다. 은재의 계략에 빠져 200억원을 도박판에서 날릴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못 미덥다. 지난해 ‘레전드(전설)급 찌질이’라는 조롱을 샀던 ‘조강지처 클럽’의 한원수(안내상 분)와 무능력한 철면피라 불렸던 ‘워킹맘’의 박재성(봉태규 분)을 잇는 ‘찌질 남편’이다.

반면 미혼 남녀 사이에선 ‘까칠남’이 대세다. ‘꽃남’에서 여자친구 금잔디(구혜선 분)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재벌 2세 구준표(이민호 분)는 이미 신드롬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분)가 그랬듯, 사랑을 뺀 모든 면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10~30대 여성 시청자는 열광한다. 최근 한 기업에서 사내 여사원을 대상으로 ‘프로포즈 하고 싶은 드라마 주인공’을 물었을 때도 구준표는 52표(42%)로 1위를 차지했다. ‘에덴의 동쪽’의 이동철(송승헌 분), 강마에가 2·3위에 올라, “경제적으로 부유하되 제 멋대로 행동하는 ‘옴므 파탈’이 여자들의 호기심을 산다”(백승의 한일합섬 홍보팀장)는 분석이 따랐다.

◆마초·가부장이 사라진 자리 대체=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극단의 캐릭터들이지만 양상은 사뭇 다르다. ‘까칠 연인’은 겉모습만 나쁜 남자이지 알고 보면 제 여자 밖에 모르는 우직한 남자로 그려진다. 반면 ‘찌질 남편’은 남들 보기엔 멀쩡한 아버지·남편이지만 실상은 못 미덥고 한심한 가족이다.

상반된 듯한 두 판타지는 표류하는 한국 남성의 지위와 이에 대처하는 여성의 이중적 욕망을 반영한다. 최근 까칠한 상담집 『건투를 빈다』를 펴낸 시사평론가 김어준씨는 “한마디로 여자들 눈에 남자들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가부장제가 쇠락하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마초적인 남성성을 긍정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10년 전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여자를 배신한 남자는 성공에 대한 갈망이라도 뚜렷했지만, ‘아유’에선 “마음 약하고 겁 많은, 피해자의 한 사람”(ID ejrdl209)에 불과하다. 알맹이 없는 가부장에 대한 조소가 ‘갈대 교빈’으로 희화화되는 셈이다.

문제는 마초가 사라진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남성 모델이 없다는 것. 김어준씨는 “마초는 거부하지만, 여자 눈치를 보며 밀고 당기기를 하는 남자들의 ‘남자답지 않음’에 여자들이 결핍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에 없는 ‘남자다움’에 대한 향수가 ‘멱살 준표’조차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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