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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문명의 충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관계의 질서 재편성 방향에 관해 쏟아져 나온 여러 전망들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마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일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교수로서 보수적 주류 정치학을 대표해 왔다고 할 수 있는 헌팅턴은 지난 93년 여름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포린 어페어즈' (Foreign Affairs)에 '문명의 충돌?' 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킨 데 이어, 지난해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편성' 이라는 단행본을 펴냈다.

국내에서는 최근 '문명의 충돌' (김영사刊) 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이 책은 국제정치의 동향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라는 외관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 이 분석은 미국정부의 외교정책 수립에 조언을 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냉전의 종식은 일본계 미국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 에서 낙관한대로 자유민주주의의 확고한 승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립적 세력관계의 형성과 유혈충돌을 수반하는 갈등구조를 가져오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같은 충돌과 대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데올로기나 경제가 아니라 문명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주관적.객관적인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지되 그중 가장 중요한 바탕은 종교다.

저자는 세계의 문명권을 7~8개로 나누고, 탈 (脫) 냉전 시대의 국제분쟁은 문명의 대립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서구문명은 보편적 문명이 아니라 여러 문명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으로 현혹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서구의 국제정치적 헤게모니의 고수에 집착하는 철저한 서구중심자다.

이는 그가 국제정치의 세력구도를 서구와 비서구세력의 대립구도로 파악하고 있으며, 미국인들은 서구문명권 (가톨릭 - 프로테스탄트 문명권) 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문명적 정체성을 확립해서, 이같은 대립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비서구문명권 중에서 그가 보기에 서구문명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세력은 이슬람세력과 중국문화권이다.

이슬람권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극도의 악의적인 편견에 찬 것이며 이른바 유교적 중국문명권 (한국도 포함된다) 의 경제적.국제정치적 세력부상에 대해서도 적개심에 가까운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미 93년 논문에서 유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이 연합하여 서구의 이해관계와 세력및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는 억측을 거리낌없이 공표해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킨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단행본에서는 이 주장을 오히려 강화시켰다.

헌팅턴의 명제는 그가 문명이란 개념을 대단히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으로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과 교류하면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실상 부인하며, 또한 문명을 지배계급의 공식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한 사회에 주류문화와 반 (反) 주류문화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한다.

이같은 태도는 패권국가 지배계급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헌팅턴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지를 고수하는 것은 바로 이 집단이 새로운 국제관계의 동향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한정숙 (서울대교수.서양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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