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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 견공에게 보내는 양해각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팽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혀를 내밀고 체온 조절하는 그대. 복날 더위는 정말 너무하는 것 같애. 벼 포기는 통통해지고, 여물어가는 대추소리에 대추나무는 가슴이 뻑적지근할 지 몰라도 우리는 발 밑에 뿌리가 없잖나. 물론 예전에야 계곡을 찾아가 등줄기에 대침을 맞는 듯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이나 참외의 단 물기를 섭취하는 탁족 (濯足) 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계곡은 너무 멀어. 그렇다고 해안이 가까워서 두꺼비처럼 모랫집을 짓고 모래알의 따땃한 감촉에 몸을 옴씰거리며 견뎌볼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린 도시에, 직장에 갇혀 나름의 복날을 견뎌내야 하지 않겠어. 은하계 그리고 태양계의 별족에 속한 자로서 일년에 한번 쯤의 복더위는 의연하게 견뎌야한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게 뜻만큼 쉬운가.

며칠 전 패스파인더호가 화성에 도착해서 전송한 사진 봤나. 벌겋게 달아 있는 돌을 보면서 나는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장과 살점도 그렇게 달아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어. 지구라는 행성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게 생각보다는 힘들어. 먹고 사는 일 말고도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다짐하지만 생각해보면 먹고 사는 일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도 않아. 안쓰럽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말인 데 우리말에 '복날 개 패듯이' 란 말이 있어. 자네나 자네 일족이 들을 때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그나마 세상의 삶과 세상의 더위를 이겨가는 한 방법이기도 해서 뭐라 형용키 어려운 착잡한 심사가 되는 말이야. 물 론 우리가 그대들을 늘 그렇게 대우하지는 않지. 서로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낄만큼 서로에게 빚지고 있어. 때로는 우리가 중닭의 종아리를 오무려 찹쌀과 대추나 밤까지 넣어 자근 자근 끓여 먹으면서 이 허전하고 답답한 복날의 지구살이를 통과하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기운을 차리는 방법으로는 역시 그게 최고라는 족속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야. 물론 전에 나도 놀란 적이 있어. 북한산 자락이었는데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해서 무심히 간 곳이었어. 여러 친구들이 이미 와 있더군. 원두막에 앉아서 세상사의 일에 적당한 양 만큼 비분강개도 하다가 우스갯소리로 양념을 치면서 역시 밖에 나오니 좋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지. 소나기가 쏟아지자 더욱 신이 났고 튀긴 물방울이 맨살 위에 다가와 체온 곁에 옴살거리는 감촉이 좋더군. 조금 있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함지박이 올라오더군. 아하 그게 거기 있었어. 누군가 찬물에 손을 담가가면서 죽죽 뜯어 주더군. 연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에 소줏잔을 연거푸 비웠어. 소나기에 씻긴 대지의 풍경이 흔들리도록. 저녁 어스름이어서 우리 모두는 남은 술잔을 비우며 짐짓 청량한 바람만을 덕담으로 나누었지. 하산하면서 우리는 이제 보신했으니 용도에 걸맞게 힘을 사용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힘이 솟는 것은 아니었어. 그래 우린 이렇게 살아. 서러움과 답답함 혹은 말못할 참혹함을 꿀꺽 삼켜 너털웃음을 짓는 일이 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거든. <강형철 교수,숭의여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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