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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 속의 정조, 격정·열정·애정 … 그도 인간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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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조는 학구적이고 점잖은 선비 스타일 군주의 표본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비밀어찰에서의 정조는 흥분 잘하고 거친 언사를 쉬 내뱉는 격정의 왕이었다. 정조는 19세기 대표 학자인 김매순(1776~1840)에 대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측근인 서용보(1757~1824)를 ‘호로자식(胡種子)’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새벽 3~5시)이 지났다”라며 분한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정조는 정사에서 알려진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군주이기도 했다.

“사흘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일하느라 피곤하지만 몸져눕는 것만은 면했다”(1799년 10월 19일), “100권 가까이 되는 주서(朱書)를 독파한다”는 내용 등 책 읽느라 바쁘다는 이야기도 흔히 등장한다.

어찰에서 드러난 정조는 다정한 인물이기도 했다. 많게는 하루에도 네 차례나 서신을 주고받던 심환지가 금강산으로 떠나자 “헤어진 지 하룻밤이 지났다. 정녕 운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머물고 떠나는 사이에 그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애틋한 마음을 전한다. 지병으로 고생하던 심환지 부인의 안부를 물으며 삼 뿌리를 하사한다. 또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에 낙방하자 300등 안에만 들었으면 합격시켜보려 했으나 그리 되지 못했다며 위로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정사에선 볼 수 없는 속내를 고스란히 담은 어찰이기에 왕은 이를 비밀에 부치고자 했다. 심환지에게 “(서신을) 보는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하든지 하라”는 명을 내리고, “터럭만큼이라도 누설될까 걱정하여 이렇게 돌려보내라고 부탁하는 것이다”라며 읽은 후 돌려달라고 주문한다. 이토록 부탁을 해도 심환지가 입조심을 하지 않자 “이른바 ‘이 떡을 먹고 이 말을 참아라’는 속담과 같으니, 다시 명심하는 것이 어떠한가. (…)경을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라며 농담 섞인 꾸짖음을 전하기도 한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정조가 노련한 정치가였듯 심환지 역시 노회한 정치가라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맥락에서 어찰첩을 보관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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