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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美 대중음악 대부 레이 찰스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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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각 장애를 극복하고 미 대중 음악의 대부(代父)가 된 레이 찰스가 10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타계했다. 73세. 사망 원인은 간질환에 따른 합병증이다.

그는 열세차례나 그래미상을 거머쥔 미국 최고의 솔(soul)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1950년대 고스펠을 대중 음악으로 끌어들이며 솔 음악을 창시했다. 이후 발라드.리듬 앤드 블루스(R&B).재즈.컨트리팝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넘나들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남부 조지아주 얼바니 태생인 레이 찰스는 극빈층 출신이다. 세살 때 이웃집 카페 주인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운 것이 인연이 돼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곱살 때 녹내장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어머니의 보살핌에 힘입어 레이 찰스는 점자로 악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알토 색소폰.트럼펫.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도 익혔다. 열다섯살 때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는 밴드를 따라다니며 본격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54년에 발표한 '아이 갓 어 우먼'이 성공하면서 대중 음악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후 '디스 리틀 걸 오브 마인(55년)' '토킨(57년)' '돈트 렛 더 선 캐치 유 크라잉(59년)' '왓 아이 세이(59년)' 등을 잇따라 히트시켰다.

60년에 발표한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는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는 계기가 됐다. 이 노래는 79년 조지아주 공식 주가(州歌)로 채택됐다. 불후의 히트곡 '아이 캔트 스탑 러빙 유'를 담은 62년의 앨범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8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이름이 올랐으며 92년에는 미 PBS 텔레비전에서 '레이 찰스-솔의 천재'라는 제목으로 그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스티비 윈우드.조 카커.밴 모리슨.에릭 버든 등 수많은 거물급 음악가가 그를 모방하고 추앙했다.

그는 헤로인 중독으로 수차례 체포돼 재활 의료원을 드나들어야 했고 두 차례 결혼하고 사생아까지 두는 등 복잡한 사생활 때문에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다. 음악은 내 피처럼 나의 일부며,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힘이자 내게는 음식과 물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찰스는 78년 발표한 자서전 '브라더 레이'에서 자신이 음악에 열정을 쏟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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