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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마음 엿보기]‘백 년 여우’ 전설과 연쇄살인범 강호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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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15면

대부분의 살인범은 보통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하고 평범해 보인다. 살인이 보통 열등감과 가슴에 맺힌 한(恨) 때문에 충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평소에는 오히려 약하고 순할 수도 있다. 일반인이 그들에게 전율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모든 인간에게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지만, 건강한 자아는 파괴적 충동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조정해 가며 남에게 해로운 일을 삼간다. 그러나 자아가 여러 가지 이유로 왜곡되게 성장해 고착되면 선악의 두 측면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split)되어 철저하게 따로 돈다(dissociation). 조직폭력배·강간범·사기꾼 등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도 특정 상황에서는 매우 선한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번에 사람들을 죽이는 집단살인자(mass murderer)와 달리 연쇄살인범(serial killer)은 보통 때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가 살인을 저지를 때는 성적 쾌감이나 도박·마약에 빠진 사람들과 비슷한 강박적 사고와 행동을 보인다. 권태로운 마음과 공허감에 빠져 있다가 살인을 도모할 때는 병적인 불안과 함께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마침내 살인을 저지를 때는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아팽창감과 변태성적인 극치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연쇄살인범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뉘우치기보다 오히려 살인 행위를 통해 억눌러 왔던 충동이 해소되어 시원하다고도 말한다.

잡히고 나서도 자기 범죄를 극적으로 과장되게 미화해 남들에게 으스대거나 타인이나 사회에 잘못을 돌리는 원시적이고 파괴적인 ‘투사(投射·projection)’란 심리기제를 사용한다. 사회를 탓하는 지존파와 유영철, 책을 쓰겠다는 강호순이 좋은 예다. 모방범죄(copy cat)를 조장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출판은 절대 반대다. 신나치주의자에게 교과서로 읽히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생각해 보자.

공식적인 연쇄살인범의 기록이 서양에서는 15세기 이후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서양 심리학자들은 연쇄살인범을 산업화나 자본주의가 가져온 인간 소외의 산물이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영국·일본·독일 등 도시화된 선진국에서 연쇄살인 발생률이 월등히 높다. 그러나 우리 민담에는 밤마다 가족을 하나하나 죽이고 마침내 온 마을 사람마저 다 잡아 먹는 여우누이, 아리따운 여성으로 변해 남자들을 잡아먹는 백 년 묵은 여우, 억울한 한 때문에 사또들을 죽게 하는 아랑 낭자가 있고, 불설앙굴마경에는 악귀에 사로잡혀 백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앙굴마 이야기가 나온다. 구약의 욥기에도 사탄이 욥의 친척을 차례차례 죽이고, 헨젤과 그레텔을 잡아먹으려는 마귀할멈 역시 일종의 연쇄살인범이다. 보통사람들도 무서운 살인범에게 쫓기거나 스스로 살인자가 되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살인과 관련된 공포나 판타지가 시공을 초월해 인간 심성에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살인범을 사탄이나 악귀, 억울하게 죽은 귀신에 홀렸다고 보는 것은 전근대적 이해방식이다. 현대 의학은 무의식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행동화하는 이들을 “남의 고통에 둔감하고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가학적인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로 간주한다. 스스로의 힘·지배력·우월감에만 집착할 뿐 영혼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에 대한 통찰이 없는 이들의 치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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