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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눈속임 생활마술 바람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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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LG 화재 영업지원팀 윤창대(32)씨. 거래처 사람과의 첫대면 자리에서 명함을 내미는데, 백지다.‘이 사람이 왜 이래?’ 상대방이 어안 벙벙해 하는 사이 윤씨의 손이 꿈틀꿈틀하더니 글씨가 생긴다. “어,신기하네요.” 상대의 입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윤씨는 담배를 꺼내 증발시키고 다시 만들어보인다.

이쯤 되면 이미 첫만남의 서먹함은 없다.더 보여달라며 재촉하기 일쑤다.얘기 나누는 틈틈이 고무줄·휴지등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저를 기억 못할 수가 없죠.헤어진 뒤 전화를 걸어 마술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하철에서 특수제작된 명함을 꺼내들고 연습하는 윤씨에 홀려 옆사람이 따라 내린 적도 여러번이다.

소아과 전문의 김남헌(47)박사도 마술 덕을 톡톡히 본다.병원에만 들어서면 사색이 되곤 하던 아이들이 김박사의 요술 앞에선 표정이 바뀐다. 눈망울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김박사는 동창모임에서도 늘 솜씨를 자랑한다. 음식값을 지불할 땐 너덜너덜한 종이조각을 낸다. 주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슬그머니 종이가 돈으로 변한다.“가족과 친구들이 무척 재미있어 하죠.훗날 손자가 생기면 전수해 줄 생각입니다.”

요즘 마술이 뜬다. 화려한 연미복 차림 마술사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요술이 점차 보통사람들의 손에서 꽃을 피운다.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은 마술전문학원 애디슨 월드 매직(02-3443-1985)의 정하성(43)원장.

87년부터 영국을 넘나들며 배운 마술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 지난해 5월 학원을 세웠다. 정원장에게 비법을 배운 사람은 이미 4백여명. 이들은 어딜 가나 ‘재미있는 사람’소릴 듣는다.

“서양에선 모르는 사람끼리도 서로 매직(마술)을 보여주며 즐깁니다.매직은 일상생활의 일부죠.”

미국·유럽은 물론 일본·동남아에서도 마술은 늘 사람들 가까이 머문다.식당에선 웨이터들이 손님을 즐겁게 해주고 영화배우·가수들도 TV에서 마술 솜씨를 뽐내곤 한다.유럽 명문가에선 대를 물려가며 전수하는 비법도 있을 정도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마술 보급은 걸음마 단계. 하지만 학생들은 물론, 주부·노인들까지 고루 관심을 보이고 있어 전파속도가 빠르다.젊은이들은 인터넷 매직 사이트(http://www.uelectric.com /allmagicguide.html)에서 저명한 외국 마술사들의 공연을 즐기고 기술을 배운다. 여성 마술사 정은선씨는 얼마전 ‘카드 매직’이라는 기초 마술법 안내책을 펴내기도 했다. 마술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내성적이던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항상 친구들을 몰고 다니죠.” 동부화재 오중근(43)보상과장은 중학생 아들이 마술을 배운 뒤부터 성격이 활달해지고 성적도 부쩍 올랐다고 자랑한다.

일반인의 관심과 전문 공연인의 인기가 비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서양에선 마술사들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아는 만큼 즐긴다’는 얘기가 마술에서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물론 전문가들이 펼치는 마술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비법을 조금씩 공개하면서 계속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사람들은 공개된 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새로운 연기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호기심의 일부 충족을 통해 마술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고나 할까.

마술사의 생명은 손기술과 연기력에 있다.영화 장면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울고 웃듯,매직도 분명 눈속임이지만 관객들은 기쁜 마음으로 속아 넘어간다.그래서 마술사의 표현력이 중요하다.

[ 41면 '마술' 서 계속 ] 서구사회에선 공연 마술의 기본 원리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가령 커다란 건물등을 한 순간 사라지거나 나타나게 하는 마술은 거울.프리즘등으로 정교한 무대장치를 만들어 빛의 반사.굴절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거나 여러 곳에서 동시에 불가사의한 장면을 연출하는 심령 마술은 대개 관객들의 군중심리나 특수 고안된 도구를 이용한다.

온몸을 꽁꽁 묶은 뒤 빠져나오는 탈출 마술과 사람을 자르는 절단 마술, 몸을 띄우는 부양 마술은 모두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진 장치들을 관객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배치하는 방법등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런 원리를 짐작하면서 공연에 몰두한다.

그들의 완벽한 기술과 연기력에 매료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마술이 진정한 공연예술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형편이다.

철저하게 베일을 드리워온 것이 일반인들을 멀어지게 한 건 아닐까. 하지만 요즘의 마술 붐은 전문 공연인들에게도 활력을 준다.

"마술쇼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국내 마술사들의 전문공연장으로 활용될 '마술카페' 가 연말쯤 경기도성남시에 탄생할 예정입니다.

" 롯데월드 마술쇼 최길순 (35) PD의 설명이다.

점차 삶의 공간에 확산되는 생활 마술. 여기에 김정우 (28) 씨등 세계적인 재목감이 등장하면서 공연 마술 '붐 만들기' 에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마술이 우리네 잿빛 세상을 투명하게 바꿔놓을 그날은 언제일까.

글=강주안·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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