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처리 두고 계파 갈등 … 지도부 사실상 와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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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제3차 중앙집행위원회가 6일 오전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에서 열렸다. 진영옥 위원장 직무대행(右)과 이용식 사무총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회의에선 지도부 총사퇴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김도훈 인턴기자]

민주노총이 1995년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민주노총 핵심 간부가 여성 조합원을 성폭행하려 한 사건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은폐하려 시도했고 피해자를 협박했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이 사건 처리를 두고 잠복해 있던 내홍이 불거지면서 부위원장들이 대거 사퇴했다.

이석행 위원장이 구속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지도부가 사실상 와해된 것이다. 내분 과정에서 온건파 지도부가 밀리면서 강경파가 득세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 때문에 노사정 대타협이나 비정규직 고용 기간 연장 등의 주요 현안 처리가 힘들어지게 됐다.

◆지도부 총사퇴 요구=현 정부 들어 민주노총은 정부와 대화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총파업과 같은 투쟁 방식은 ‘법과 원칙’을 내세운 정부의 대응 앞에서 무력해졌다. 경제위기가 심해지면서 민주노총의 강경 투쟁 방식은 국민에게서 더 멀어지고 있다. 현장의 동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허영구 부위원장을 비롯한 강경파(현장파·중앙파)는 그동안 “MB 악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도부를 비판해 왔다. 이석행 위원장이 이끄는 현 지도부는 온건파(국민파)다. 6일 사퇴한 허 부위원장 등은 민주노총 안에서 강경 노선으로 분류된다.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이석행 위원장의 오른팔로 알려져 있다. 사퇴한 부위원장들은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며 현행 이석행 집행부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총사퇴를 거부하고 있다. 5, 6일 이틀간 진행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계파 간 고성이 오갔고 감정싸움으로 번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 이념 갈등 때문에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갈라섰듯이 민주노총도 계파 갈등이 심화되면서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쪼개질 때 민주노총의 내분이 극심했었다. 가까스로 봉합되긴 했지만 이번 갈등이 분열을 촉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비상대책위 체제로 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올해 말 치러지는 위원장 선거에서 계파 간 갈등은 극에 달할 전망이다. 강경파는 2004년 국민파인 이수호 전 위원장 시절 넘어간 집행부 자리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2005년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금품 비리로 이수호 집행부가 총사퇴한 뒤에도 국민파는 굳건했다. 당시 비상대책위는 강경파인 전재환씨가 맡았지만 보궐선거에서 국민파인 조준호씨가 당선됐고, 이어 이석행씨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대의원의 60%가 국민파이기 때문이다.

◆“누가 돼도 강경 투쟁”=이번 사건을 계기로 누가 주도권을 잡든 민주노총의 기조는 강경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민주노총이 현재로선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연구위원은 “현재의 민주노총은 정책 기능과 현장 장악력이 약하기 때문에 누가 주도권을 쥐든 간에 강경 노선을 견지하면서 단결을 꾀할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국민파가 다시 주도권을 쥔다고 해도 강경파의 지도부 흔들기는 계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들을 다독거리는 것이 지도부의 과제가 될 것이고, 따라서 강경파가 주장하는 투쟁노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구도로 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비정규직 보호법 개정,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복수노조 교섭 창구 단일화 등 굵직한 현안을 둘러싸고 민주노총과 정부 간에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김기찬 기자 ,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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