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흉악범죄만 터지면 대중매체에 '몰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폭력사건이 나면 으레 당사자들이 봤다는 영화.대중소설.만화.TV프로그램 등 대중매체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거기서 묘사되는 폭력을 관객들이 단지 오락으로 즐기고 마는지, 아니면 그대로 배워 사회를 더욱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차분히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따져 보는 일일 게다.

국내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례들을 보며 생각의 지평을 넓혀보자.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이 있다.

94년5월 부친을 살해한 박한상은 비행기안에서 '드레스드 투 킬' 이라는 영화에서 범죄은닉 수법을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94년9월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지존파는 '지존무상' 등 홍콩영화를 흉내내고 감옥과 범죄자들을 다룬 대중소설 '뼁끼통' 을 돌려 읽으며 수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에 붙잡힌 막가파의 두목은 영화 '보스' 를 보면서 조직폭력배 두목의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최근 경찰에 잡힌 고교생들은 일본만화에 나온 이름을 따서 '일진회' 라는 교내 불량서클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영화.대중소설.만화들은 모방범죄의 수법을 제공하고 폭력을 미화하거나 당연시하게 만들며 심지어 범죄를 부추기기도 한다고. 판단력이 떨어지는 청소년들이 흉내 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추방해야지. 당연히 그렇고말고.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근엄한 주제의 영화를 주로 만든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리만 감독의 고백을 들어 보자. "나는 여섯살 때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에 가서 '검은 미녀' 라는 영화를 봤다.

모자를 쓴 남자가 마굿간에서 불타는 건초더미를 발견하는 장면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는 아주 흥분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말이 무사히 구조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 (유럽영화학회 발행 '펠릭스' 지 92년호에 실린 글) 이에 대한 영국 영상원 (BFI) 청소년물 책임자 캐리 베이설지트의 해설 - "6세 소년도 영화속에 등장하는 꾸며낸 환상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물며 어려서부터 텔레비전.비디오.만화가 제공하는 숱한 환상을 경험한 청소년들이야 어련할까. " (95년 BFI발행 청소년 미디어 연구집 'In Front Of Children' 중에서) 일상적인 대중매체의 위해성에 대한 시각과는 '다른 생각' 이 엿보인다.

여기서 4년전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빠뜨릴 수 없다.

93년 2월 영국 중부 맨체스터에서 10세 소년 두명이 6살짜리 꼬마를 철로변으로 유인해 돈을 뺏고 벽돌로 살해했다.

이들은 수사과정에서 "사건 며칠전 텔레비전에서 '차일즈 플레이2' (Child's Play2) 라는 공포영화를 봤다" 고 말했다.

어린이 모습의 인형 속에 악령이 들어와 어른들을 살해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사건이 벌어지자 도덕적 지도력 부족을 이유로 교회를, 인성교육 태만을 이유로 학교를 탓하던 영국 언론들은 이들의 진술 이후 " (악령이 깃든) 어린이가 살인하는 장면이 이들의 범죄를 조장했다.

이 영화를 불태워라" 며 흥분했다.

'차일즈 플레이2' 의 비디오 테이프는 결국 판매와 대여가 금지됐다.

범인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그해 11월에 풀려났고 영국의 교육고용부 (교육부와 노동부를 합친 관청) 는 사건의 원인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장기간의 논의 끝에 당국은 "두 소년 범죄자들의 행위와 이 영화를 연결지을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 발표했다.

사회가 한편의 영화를 끔찍한 사건에 대한 희생양으로 이용했음을 증명해주는 결론이었다.

런던대의 미디어 학자 데이비드 버킹엄 교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실제 반응을 면접을 통해 조사했다.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염려한 것과는 달리 영화 속의 환상과 현실을 잘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면접내용은 이랬다.

"귀여운 인형이 악마 모양으로 변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싱거웠어요. " (11세 소년) "별로 무섭지도 않았어요. 꾸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니까요. " (12세 소녀) 그는 "대중매체는 생각의 전달과 오락이라는 두가지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중요한 것은 즐기던 오락을 그대로 실생활에 적용할 만큼 청소년이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라고 주장했다.

(96년 맨체스터대 출판부 발행 '움직이는 이미지' 중에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범했던 오류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이상국가론' 에서 "극시 (劇詩) 를 금지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다.

감상적인 내용 때문에 젊은이들이 나약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늘날 그리스의 극시들은 최고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 우리는 플라톤의 오류를 재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매체에 대한 단속으로 폭력이 근절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채인택 기자

<사진설명>

폭력사건과 대중문화 몰아세우기는 언제나 맞물리지만…. 단정은 위험하지 않을까. 사회를 놀라게 만들었던 지존파.막가파 일당들과 그들의 범행과 관련이 있다고 지목됐던 영화의 장면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