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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을 두텁게] 현장 점검 - 신빈곤층 사각지대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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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전시 동구에 사는 김재권(38)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일감이 끊겨 소득은 줄고 모시고 살던 아버지마저 병원에 입원 중이기 때문이다. 김씨와 단둘이 살던 아버지는 지난해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병원 치료가 끝나 요양원으로 옮겨야 하지만 300만원가량의 치료비를 못 내 한 달째 퇴원을 미루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건축현장에서 설비기술자로 일하면서 월 100만~15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경기 침체로 건설현장이 줄자 한 달에 15~20일은 나가던 일감이 끊겼다. 지난 석 달간 번 돈을 다 합쳐도 100만원도 안 된다. 다급해진 김씨는 주민센터(동사무소)에서 지원을 요청했지만 근로 능력이 있어 기초생활 수급자가 될 수 없었다. 2주 전에는 주변 종교단체의 권유로 보건복지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긴급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원 불가’라는 답을 받았다. 김씨 아버지의 뇌졸중이 처음 발병한 시점이 3년 전이라 발병 후 1~6개월 내 지원하는 긴급 지원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김씨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다’며 마음을 다지면서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 했는데 도저히 길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경제위기 이후 사각지대에 놓인 신빈곤층이 신음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비상 상황이 계속되는데도 정부의 복지제도는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기준을 완화했다. 하지만 이는 금융위기 이전의 통상적인 수준에서 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 수급자를 선정하는 기준이 까다로운 점도 신빈곤층의 추락을 부추기고 있다.

일선 현장의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들은 “위기 상황에서는 한시적이라도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기준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대구광역시의 한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은 “청와대나 복지부가 지원을 늘리라는 말만 하고 기준이 그대로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위기 가정을 위한 예산이 있어도 기준이 너무 엄격해 신빈곤층에 돈을 지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기술이 없더라도 65세 미만의 건강한 성인이면 월 50만원가량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경기가 좋은 시절에는 이렇게 추정해도 문제가 없지만 요즘 같은 때는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일이 없다. 이 기준 때문에 기초 수급자가 못 되거나 생계비가 줄어든다.

류정순 빈곤문제연구소장은 “경기가 나빠지면서 도저히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데도 근로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지원에서 제외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한다.

병이 들거나 부상을 당할 때도 지원받기 힘들다. 현행 기준은 의사가 ‘근로 능력 상실’이라고 판정해야만 근로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류 소장은 “디스크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앓거나 5급 이하의 장애를 갖고 있는 40~50대가 진단서가 없어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엄격한 부양가족 기준이나 재산 기준도 이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서울에 사는 김모(70)씨는 지난해까지 폐지 수집 등 일용직으로 월 20만원 안팎의 돈을 벌었지만 최근에는 소득이 끊겨 주민센터에 생계비 지원을 신청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월 200만원 안팎의 돈을 버는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김씨의 아들은 중고생 자녀 2명을 키우느라 김씨에게 용돈을 줄 여유가 없다. 강원도 춘천에 사는 서모(43·여)씨도 목수였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일자리를 잃었지만 9000만원짜리 집이 있다는 이유로 지원받지 못했다. 서씨가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지만 하루 수입이 2만원이 안 된다. 서씨는 생계를 위해 집을 팔거나 사채를 써야 할 상황이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구인회 교수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위기에 처한 신빈곤층이 자산을 탕진하고 가정이 해체된 후에야 지원받을 수 있다”며 “부양가족 기준 등을 현실화하고 긴급 지원 기간과 선정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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