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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변화바람>무너진 의료체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북한 의료체계가 삐거덕거리고 있다.의료 기자재와 의약품 부족 때문이다.최근 북한의 보건.의료현황 보고서를 낸 국제적십자연맹(IFRC)은“북한이 전염병에 무방비상태”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의료 기자재와 의약품 부족이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북한에서 동의사(한의사)로 활동하다 귀순한 한창권(36)씨는“80년대초부터 약품이 거의 동났다”고 밝혔다.IFRC 보고서도“고려약재(한약재)만 구할 수 있는 상태”라고 확인했다.병원진료는 대개 진찰만으로 끝난다.신의주에서 귀순한 김초미(51)씨는“의사가 청진기나 대보고 열을 잰 뒤 기껏'약 사먹으시오'하는게 진찰의 전부”라고 말했다.

때문에 일반 주민들은 시장에서 몰래 파는 약을 구해 쓴다.지난해 12월 귀순한 김명숙(35.여)씨는“안전원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시장내 잡화가게에 가면 약을 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제약공장 직원이나 의사들이 중간에서 빼돌린 약이 시장에 나돈다는 것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의약품 공장인 순천약공장에선 페니실린.마이신등,평양제약공장.평양만년제약회사에서는 한약이 생산되지만 지난 95년부터 가짜 약이 부쩍 많아졌다.쌀가루.강냉이가루에 쓴맛의 약초를 섞어 알약(마이신)으로 속여 파는 경우도 있다.가짜약 소동 때문에 중국산이 훨씬 비싸게 거래되기도 한다.

약품부족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의료당국은“어떤 약재가 좋다고만 해야지 사먹으라고 하진 말라”는 묘한 지시를 내린적도 있다.

의료계의 부패도 만만치 않다.돈이 있으면 의사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약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김초미씨는“손을 쓰면 다른 환자에게 갈 약까지 받을 수 있다”고 경험을 털어놓았다.의사들이 노골적으로 손을 내밀기도 한다는 것. 김명숙씨는“제대로 치료받으려면 쌀이나 술.담배등을 성의껏 마련해야 한다”면서“한번에 다 치료할 수 있는 병도 '꺾어서'다음날 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했다.

귀순자들은 북한 의사들 머리에 인술(仁術)이란 단어가 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한창권씨는“의사월급이 기껏 75원에 불과하다”고 어려운 사정을 밝혔다.

외과의사라 해도 수술수당이 매월 20원쯤 더 나오는데 그친다.고급담배 한갑(25~30원)에도 못미친다.때문에 외과의는 기피직업으로 바뀌었다.

내과의는 환자에게 약을 줄 수 없는 심적 고통은 있지만 몸은 편하다고 한다.그런 가운데 의사 선호도 1위는 산부인과.임신중절로 뇌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악한 의료조건이지만 의료사고때는 대개 의사 책임으로 돌아간다.사회안전부 병원에서 보철의사(치과기공)로 일했던 정재광(36)씨는“의료사고가 나면 법의사들이 모든 판단을 하는데 담당의사가 불리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의료사정이 전반적으로 나쁘다보니 진료소나 인민병원등 1차기관이 상급병원으로 환자를 의뢰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의사라면 양의.한의 가릴 것 없이 약초를 캐러 다녀야 한다.한창권씨는“1인당 봄에 10㎏,가을에 15㎏등 25㎏의 약초가 할당된다”고 밝혔다.일부 의사들은 약초 할당량을 서둘러 채운 뒤 장사에 나서기도 한다.

의료체계가 유명무실해지자 민간요법이 부쩍 유행하고 있다.간염은 미나리,기관지염은 꿀에다 마늘을 재워 먹는 따위다.퇴직의사들의 가정 의료행위도 늘고 있고 무자격자들이 침놓고 뜸뜨는 일도 많다고 한다.

의료사정이 어려워도 일부 간부들은 예외다.사회안전부 평양시 보위부에 근무하다 귀순한 오영남(34)씨는“안전부 병원에는 없는 게 없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밝혔다.한창권씨는“간부들은 보약도 무료로 받는다”면서“병원 검열도 있지만 처방전으로는 고가의 약을 누가 썼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의료사정의 악화로 가장 고통받는 층은 어린이들이다.홍역.소아마비.풍진.디프테리아.파상풍등의 백신마저 구하기 힘들다.민간 국제기구들이 대북한 의료지원에 활발히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김성진 전문기자

<사진설명>

북한에서는 심각한 의약품 및 기자재 부족으로 주민들이 갖가지 병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다.김정일이 수출용 의약품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통일문화연구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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