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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2. 프로농구 연구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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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LA올림픽에서 여자농구 은메달의 주역이었던 박찬숙 선수(左). 그는 광고모델이 된 최초의 아마농구 선수로서 농구의 프로화에 기여했다. [중앙포토]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한국의 스포츠는 요동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한국에도 본격적인 프로 스포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축구도 어설픈 형태지만 이듬해인 83년 프로팀들이 탄생했다. 농구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러다가 농구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농구계는 83년 겨울 '점보시리즈'(나중에 농구대잔치로 개명)라는 걸 만들어 농구의 인기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92년, 프로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한국 여자농구의 최고 센터인 박찬숙이 대만에서 활약하다 국내 코트에 복귀, 태평양에서 뛰었다. 그러면서 태평양화학 CF에 출연했다. 현역 농구선수가 광고에 출연한 것이다. 당연히(?) 농구협회에서는 '아마추어 선수가 광고에 출연해도 되는가'라는 자격 논란이 일었다. 당시 국제 스포츠 무대는 프로와 아마의 구별이 없어졌고, 바르셀로나올림픽엔 프로선수의 출전도 허용됐다. 엄격하던 아마추어리즘은 점차 자취를 감췄고, 농구협회의 명칭도 대한아마농구협회(KABA:KOREA AMATEUR BASKETBALL ASSOCIATION)에서 대한농구협회(KBA)로 바뀔 정도였다. 결국 농구협회 이사회는 박찬숙의 CF 출연에 대해 '술.담배 등 청소년에게 유해한 상품이 아닌 경우엔 선수들의 CF 출연을 허용한다'고 결정했다.

이 무렵 신보창업투자 사장이던 나는 김상하 농구협회장과 함께 경제사절단으로 유럽에 가게 됐다. 당시 대한상의 회장을 겸했던 김 회장의 배려였다. 70년대 초반부터 TBC와 KBS에서 농구 해설을 하면서 NBA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나는 한국농구도 빨리 프로화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나는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 회장에게 "한국농구도 프로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프로농구를 연구.검토할 소위원회를 결성하라"고 지시했다. 93년, 나를 포함해 이인표(당시 삼성전자 부장).조승연(당시 삼성생명 총감독).방열(경원대 교수).박신자(농구인) 등 다섯명으로 프로농구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94년 7월에는 김인건(당시 삼성전자 감독).정광석(당시 현대전자 감독).김홍배(당시 상무 감독).최인선(당시 기아 감독).신동파(당시 서울방송 감독) 등 실업팀 감독들이 대거 참여했다. 프로농구 연구모임은 이 때부터 활기를 띠었다.

나는 우리보다 먼저 프로화를 단행한 필리핀에서 자료를 모아왔고, 이인표씨는 NBA와 호주 프로농구의 자료를 구해왔다. 나는 각국의 프로 추진 현황을 비교해보면서 우리나라 프로농구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이때는 이미 농구대잔치가 겨울 스포츠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윤세영 SBS 회장을 골프장에서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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