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범죄자 DNA 관리 시스템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1996년 12월 31일 영국 서튼 콜드필드, 17세 여학생이 연말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살해된다. 여학생 몸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발견됐다. 경찰은 DNA를 검출해 보관했다. 2003년 콜린 웨이트(당시 41세)란 남성이 도심에서 난동을 피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의 DNA를 추출한 결과 7년 전 여학생의 몸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일치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은 2000년부터 5년간 약 6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범죄자의 DNA를 관리하는 프로젝트(DNA Expansion Program)를 추진했다. 모든 범죄자의 유전자가 관리 대상이다. 행패를 부린 사람의 체포가 7년 전 살인 사건의 해결로 이어진 것. ‘시간이 흘러도 범인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이 DNA 수사’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7명을 성폭행 뒤 살해한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붙잡혔다. 경찰은 DNA 물증을 통해 자백을 받아냈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 범죄자의 DNA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다.

◆4년째 표류=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17대 국회에서 ‘유전자감식정보 수집법안’이 상정됐다. 그러자 인권단체 등이 강력히 반발했다. 법안은 자동 폐기됐다. 지난해 3월 법무부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유전자 수집에 관한 법률을 재추진하겠다”고 했다.

법안이 재등장한 배경은 ‘안양 초등생 살인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성폭력·살인·강도·방화 등 11개 중범죄자들의 유전자를 수집해 활용하는 법안이 마련됐다. ‘유전자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으로 법안의 명칭을 바꾸면서 인권보호 장치를 명문화했다. 경찰은 구속 피의자 중 본인의 ‘동의’를 얻어, 검찰은 형이 확정된 수형자로부터는 ‘강제로’ DNA를 수집·관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입법안은 아직 국회에 제출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로부터 추출한 DNA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범죄자 DNA 정보은행’의 구축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한면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장은 “70여 개국이 관련 법을 제정했다. 우리는 사건이 터지면 그때그때 정보를 모아 수사한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인권침해 논란=유전자 정보 수집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가 공개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고려대 박경신(법학) 교수는 “DNA는 지문과 달리 개인 식별 정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수집 범위가 늘어날 경우 국가가 국민을 감시하는 체계가 갖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모든 범죄자를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예비 재범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통제 사회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과수 한 과장은 “범죄 수사에 활용되는 것은 일반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개인 식별이 가능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담고 있다”며 “미국과 유럽연합 등 20여 개국이 상호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인권 침해에 대한 우려가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인식·이에스더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