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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代 여성의 내면 풍경 담아 - 김정란.김혜순 시집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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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40대 여성의 내면 풍경은 어떨까.밤 새 뒤척이던 젊은 날의 고뇌를 이제 일상의 흐름에 편안히 실어보내고 있을까.아니면 아직도 자신과 세계의 본질을 찾아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중견여류시인 김정란씨와 김혜순씨가 최근 잇달아 신작시집'그 여자,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세계사)와'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를 각각 펴냈다.

76년'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정란씨는 세번째 시집인 이번 시집에서도 자아와 세계의 본질에 대해 끊임 없이 물고늘어지는 아픈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신이,문밖으로 쫓아버린 여자/당신이,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그 여자,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그러나/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건너편의 여자'의 마지막 부분에서 볼수 있듯 김정란씨는 이 시집에서'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그 여자,즉 자아를 찾아 나서고 있다.“내 영혼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치받치는 강렬한 내면의 자아의 말,내가 세계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짓눌러두었던 그 여자의 말이 절대로 입을 다물지않았기 때문”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40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살아움직이는 자아와 그 자아가 비추는 세계의 오묘함을 괴롭게 찾아 나서고 있다.

그 여정에서 김정란씨는 현실의 일상성을 파괴한다.기존의 언어와 비유.상징이 띠는 의미를 파괴하고 필요하다면 시적 형식도 파괴해버린다.“바다/해가 졌다/저녁내 흔들리는 모랫벌//대낮의 편안한,규정된 부피를 부정하는/칼처럼 달이 뜨고//바람이 잔잔히 불기 시작했다//……//희디흰 뼈 눈부시게 드러나고/바람과 바람의 결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던/잊혀진,강렬한 말들이/핏줄 위에서 널을 뛰기 시작한다//잔혹한 외출//최소한의 삶으로 버티던 여자 하나,모랫벌을 달려가/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프롤로그로 시집 머리에 올린 시'잔혹한 외출'에서 볼 수 있듯 편안한,이미 규정된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세계를 찾기위해 외로운 항해에 나서고 있는 시집이'그 여자…'이다.

79년'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김혜순씨는 여섯번째 시집'불쌍한 사랑 기계'에서“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하는 시는 싫다”며 시적 긴장을 통해 여전히 팽팽한 삶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들리는 것 같은 비명.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어젯밤의 어둠이 내지르는 비명.오늘 아침 허공중에 느닷없이 희디흰 비명이 아 아 아 아 흩뿌려지다가 거두어졌다.사람들은 알까?한밤중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를.나는 밤이 와도 불도 못 켜겠네.” 시'쥐'의 앞부분이다.환한 아침 속에서 물러나는 어둠,너무 커서 일반인 귀에는 들리지않은 어둠의 비명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그리고 그 어둠을 시인은 같은 시에서'한없이 질량이 나가는 어둠.이것이 나의 본질이었나?'하고 묻고 있다.빛과 어둠,있음과 없음의 세계를 동시에 끌어앉으려는 김혜순씨의 시는 그 시적 긴장으로 인하여 아래의'달'과 같은 범상치않은 세계를 열어젖힌다.

“텅 빈 운동장에/나 혼자 공을 치고 있다/밤바람의 발자국이 나뭇잎 한잎 한잎/그리고 또 한잎/일일이/디뎌주고 있을 때/텅 빈 운동장에/공 치는 소리/텅텅 울리고 있다//나 빠져나간 너를/텅/텅//나는 공을 던져 그물 바스켓 속에!//너를 던져/높이!//너는 내가 입김 불어넣어 만든 허방이었나?//나 오늘밤/네 얼굴/공중에 묶어두려고//공을 던져올리면 바람도 나를 던져올리나?/바람이 나를 던져올려/텅 텅 칠 때마다/구멍 난 내 얼굴 가죽도/팽팽히/당겨지는 것 같다/오호라,그렇다면 나도 그 누가 입김 불어 만든,/그런 허방이었나?//텅 빈 밤하늘에/누군가 팽팽한 달을/손바닥으로 치는 소리'텅/텅” 농구공을 치며 나와 너,있음과 없음,천상과 지상을 모두 한 공간에 꿰고 있다.

'텅 텅'소리 하나 만으로 신화적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일상성에 안주할 수 없는 시인들의 아프디 아픈 시혼이 우리 삶의 깊이를 여전히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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