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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가장위기의가정>3. 자식인가, 짐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돈없어서 애 못낳겠다'는 소리가 괜한 엄살처럼 들리지 않는 시대다.

초등학교 5년.4년 연년생 아들을 둔 이모(40)씨의 한달치 가계부를 살펴보자. 두 아이의 글짓기.피아노 과외비가 각각 7만원씩,영어 교재비는 8만원.큰애가 미국인에게 배우는 영어회화 수강료,작은애의 과학실험.체육활동비까지 합치면 사교육비만 한달에 7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남편 월급 3분의 1을 웃도는 거금이지만 “다른건 다 아껴도 애들 가르치는 돈을 줄일 순 없다”는게 이씨 생각이다.

이씨의 경우는 지나치다고 친다해도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쪼들리지 않는 가정이 몇이나 될까.자녀 1명당 과외비로 월평균 10만원 이상을 쓴다는 게 최근 소비자보호원의 조사결과다.

생활비 안에선 도저히 감당 못해 아내가 부업전선에 나서거나 빚을 진다는 집이 15%를 넘는다.가장 혼자 벌어선 남만큼 자식 가르치기도 힘들다는 얘기다.

가장의 허리가 휘고 가정경제가 송두리채 흔들리는 가장 큰 요인이 과도한 사교육비라는데 이견이 없다.

믿고 맡길 수 없는 학교교육이나 입시제도 탓도 있다.

그러나 '많이 배워야 좋은 직장 얻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부모들의 학력 맹신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 근대 이후 뿌리내린'공부 잘하는 자식 하나면 온 집안이 팔자를 고친다'는 가치관 때문이다.소 팔고 논 팔아 자식을 대학교육시켰던 게 우리네 노부모 세대.“지금은 부모들의 경제.교육수준이 높아진 것과 맞물려 전통적인 자녀사랑이 과열로 번지고있다”는 임정빈(任貞彬)교수(한양대.가정학)의 세태 진단도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많이 벌고,많이 배운 부모들일수록 자식교육에 더욱 열을 올리는 추세다.대학 나온 엄마는 고등학교 나온 엄마보다 과외비를 30%이상 더 쓴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자녀교육이 고학력 주부들의 '대리만족'통로가 된 셈이다.

정신과전문의 이나미씨(李那美)씨는“고급 여성인력을 사장(死藏)시킨 것도 과외왕국을 부추긴 한 배경”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 부모들의 자녀 뒷바라지가 비단 사교육에서 그치는 건 아니다.과외비와 대학등록금을 넙죽넙죽 삼키던 아이들은 멀쩡히 직장을 다니면서도 결혼비용까지 손을 내민다.부모가 대주는 돈이니 아까울 게없다.

신혼부부 형편껏 혼례를 치르는 집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딸아들 치우는데 평균 3천만원 이상 든다는 통계다.

그나마 결혼비용만으로 끝나도 다행이라고 많은 부모들은 입을 모은다.“부모님 곁에서 살고싶다”는 말에 혹해서 집근처에 아들부부 전세집을 얻어준 박모씨(55).아들 혼자 버는 돈으론 아파트 관리비도 내기 힘들다는 며느리의 투정에 번번히 생활비를 대주고 있다.

아들 부부는“집값은 자꾸 오르는데…”라며 은근히 집사달라는'압력'까지 가해온다.“언제 돈 맡겨놓은 적 있냐?”며 박씨가 핀잔할라치면“다른 부모들은 유학비에,사업자금까지 준다”고 오히려 큰 소리다.

자식 떠받들어 키운'죄'로 한국 부모들은 평생을'자식들 애프터서비스'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떠먹여 주는 걸 받아 먹는데 익숙한'반쪽 짜리 성인'들을 양산한 건 부모 자신의 책임이다.

어릴때부터 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가르치는 선진국의 자녀교육방식에 눈을 돌려볼 때다.

자녀를 부모와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해주고 그만큼의 책임을 지우는 게 그네들 교육방식. 장난감 정리를 제 손으로 하던 아이들은 자라서 대학 입학금도 스스로 마련한다.“서구 대학생들은 부모에게 손 벌리기 보다는 학자금을 융자받아 대학을 다니고 취업후에 그 돈을 직접 갚아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숙자(韓淑子)박사(연세대강사.교육학)는 전한다.

자식한테만 분에 넘치게 쏟아붓다가 노후대책은 변변히 마련못하는 것도 우리 가정의 불안요소다.현재의 중년은 성의껏 부모를 모셨지만 자식들로부터는 부양 못받는 우리사회 첫 세대가 되리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 이미 자식과 떨어져 노부부끼리,독신노인만 사는 가정이 전체 노인가정의 절반에 육박한다.“'자식농사=노후대책'이란 헛된 믿음부터 깨라”는 게 한국노인의 전화 서혜경(徐惠京)이사의 충고다.

더욱이 가장이 직장에서 정년을 채우리란 보장도 없는 게 최근의 현실이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라며 자식에게 짐을 지우기 보다는 부부 스스로 결혼초반부터 독립적인 노후대비에 들어가는 게 현명한 자세다. 신예리 기자

<사진설명>

유치원 등록금에서 중.고교 과외비,결혼비용까지.한국의 부모들은 평생 자식 뒷바라지에서 헤어나지못한다.자녀들에게만 돈을 쏟아붓다가 노후대책 마련도 변변히 못하는게 많은 가정들이 처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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