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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눈>촌지신고센터 유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자정이 넘도록 TV앞에 앉아 교육방송을 보며 입시공부를 하던 아들녀석이 갑자기“저 선생님이 좀 이상해”하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교육방송 강사선정을 둘러싼 비리혐의를 검찰이 수사한다는 내용을 저녁뉴스에서 들었는데 강의를 듣다보니 바로 그날 나온 강사의 실력이 모자라 보인다는 것이었다.고3이 될 때까지 한번도 비슷한 얘기조차 입에 올린 적이 없던 녀석의 엉뚱한 반응이라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계의 촌지(寸志)문제가 끝없이 번지고 있다.일부에서는'촌지망국론'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본래 좋은 의미를 지녔다는'촌지'의 낱말이'돈봉투'나'뇌물'의 뜻으로 변질돼 버린지도 오래다.

솔직히 요즘 학부모치고 교사의 촌지문제 때문에 한두번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또 하루빨리 고쳐야 할 과제라고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데도 쉽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데는 물론 교사들의 책임이 크지만 학부모에게도 절반이상의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한다.내 자식은 남의 자식보다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달리 가르쳐달라는 그릇된 생각이 문제의 근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교사가 노골적으로 요구하니까'라든가,'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서'등 저마다 이유가 많겠지만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촌지교사를 손가락질하기 전에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한번쯤 돌아본다면 지금처럼 파렴치한 촌지문화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촌지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요즘 정부가 내놓는 대책이란게 너무 한심해 제정신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감사원이 촌지신고센터를 만들어 수십건을 접수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촌지기록부가 물의를 빚자 감사원이 재빨리 신고전화를 설치하고 고발을 독려하고 나선 것이다.사회적인 문제를 더 이상 놔둘 수 없고,각 교육청의 감사활동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 감사원의 개입논리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학생이나 학부모로 하여금 교사를 고발하도록 한 것은 우선 도덕.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제자가 스승을 고발.밀고(密告)하도록 시키는 나라가 도대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싶다.신고접수로 촌지문제를 정말 해결할 수 있다고 당국자들이 믿고 있다면 더욱 큰 일이 아닐 수 없다.더욱 꼴불견인 것은 교육청이나 교육부의 태도다.감사원의 눈치를 보며“우리는 이미 신고창구를 개설해 놓았소”라며 맞장구를 치고 나선 것이다.교육행정을 맡은 전문가들마저 여론에 못이겨 교육의 본질을 외면하는듯 해서 참으로 서글프다.촌지문제를 앞세워 교사들을 범죄집단처럼 마구 매도하고 헐뜯는다면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니겠는가. 촌지문제는 법(法)이전에 양식(良識)으로 해결해야 한다.검찰이 촌지기록부를 사건화하지 않고 처리한 깊은 뜻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법의 잣대로,수사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까발리는 것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아직까지는 교직사회가 다른 어떤 직역(職域)보다 양심적이고 순수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그러므로 교직자들을 믿고 그들의 자정(自淨)노력이 효과를 거둘 때까지 끈기를 갖고 지켜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의 날을 맞아 대한적십자사가 펴낸 수기집'잊을 수 없는 스승,잊을 수 없는 제자'를 읽으면서 한달쯤 전에 느낀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나이든 사람이 책읽다가 눈물을 글썽인다고 옆자리 동료는 놀렸지만 요즘같은 세태에서 사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행복이고 즐거움이었다.선생님이 부정한 수단을 써서 강의를 맡았다고 의심을 품고 있는 아들녀석이 과연 30년쯤 흐른 뒤 애비처럼 학창시절의 스승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가질지 걱정이다.

권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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