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국민은 올해까지만 참아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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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08면

이명박 대통령이 31일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지난 설 연휴를 전후해 전국 13개 고속도로 요금소와 서울역, 김포공항 청사에는 정부 정책 홍보책자 50만 부가 뿌려졌다. 청와대 홍보기획관실과 정부 부처들이 만든 ‘2009 설 고향 가는 길’이란 제목의 60여 쪽짜리 책자에는 몇 가지 생활정보와 함께 주요 국정과제인 4대 강 살리기와 미디어법안의 정당성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설 민심을 여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청와대가 직접 대국민 홍보전에 나선 것이다.

‘마지막 작전타임’ 같았던 1박2일 국정워크숍

#2=당초 설 직전으로 예정됐던 ‘대통령과의 원탁대화’는 용산 재개발 농성자 사망 사건이 터지면서 취임 1주년(2월 25일) 때까지 미뤄지는 분위기였다. 1월 말에 할 경우 ‘취임 ○○○일’ 하는 식의 계기를 찾기 어렵고 신년 연설을 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소 뜬금없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과 며칠 전에 행사가 전격 결정된 데는 2일 시작하는 임시국회에서의 ‘2차 입법전쟁’과 주말 반(反)정부 집회를 앞두고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내용도 자성과 반성이 중심이었던 지난해 국민과의 대화와 달리 ‘용산 참사’ ‘미디어법’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자신감 있고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강력한 국정 드라이브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말로만 희망, 희망 하면 믿어 주겠나”
31일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검은색 관용차 수십 대가 잇따라 모습을 보였다. 1박2일 일정으로 열린 ‘경제위기 극복과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한 장·차관급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위원 및 후보자 18명, 장관급 인사 5명, 수석비서관 이상 청와대 비서진 13명과 차관급 53명, 대통령 특보 4명, 대통령자문위원장 6명 등 98명이 차례로 도착했다. 전날 자정 무렵까지 생방송을 한 이 대통령과 곁에서 지켜본 일부 청와대 참모는 불과 5시간 남짓 눈만 붙이고 나온 셈이다.

워크숍이 시작될 무렵 이 대통령이 전날 인선이 발표된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에게 “최신 내정자”라고 농담을 던지며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토론이 본격화하면서 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대통령은 “국민이 올해는 인내해 주겠지만 내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믿지 않을 것”이라며 분발을 촉구했다. 청와대 박재완 국정기획수석(‘집권 2년차 국정운영’)과 박형준 홍보기획관(‘국정운영 철학과 방향’)의 발제 후 곧바로 분임토론이 이어지면서 워크숍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31일 오전 장·차관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이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집권 1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란 제목의 동영상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첫 주제인 ‘경제위기 극복과 성공적인 국정운영 전략’을 놓고 참석자들은 4개조로 나뉘어 토론을 한 뒤 오후 3시 다시 모여 각 조의 분임토론 결과를 놓고 집중 토론을 했다. 이날 오후에 시작된 두 번째 주제 ‘일자리 안정과 창출을 위한 방안’에 대해서는 밤늦게까지 분임토론이 진행됐다.

이날 토론에서는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 방안와 4대 강 정비사업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참석자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는 후문이다. 이 대통령도 토론을 독려하면서 발상의 전환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주문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최근 경제위기 상황을 언급하면서 “현재 우리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며 “이제는 우리가 튼튼한 신발을 신고 가시밭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말로만 희망, 희망 하면 국민이 믿어주겠느냐”며 “먼 훗날 오늘을 돌아볼 때 ‘100년에 한 번 있을지 모를 위기를 이렇게 극복했노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몸을 던지는 열정과 긍지로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3월 국정워크숍의 경우 새 정부 출범을 맞아 국정 철학을 교감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워크숍은 ‘마지막 승부’를 앞둔 긴급 작전타임 같은 분위기였다”며 “올해 어떻게든 정권의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는 대통령의 결의와 의지가 충분히 공유되는 자리였다”고 전했다.

‘내 방식대로 간다’ MB식 마이웨이
“(인사 문제를 두고) 미국 정치를 보라고 하는데, 말하는 사람이 미국 수준이 됐으면 좋겠다.”→“용산 문제를 갖고 정치적 이슈를 만들어 다른 문제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책임 있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정부가 언론) 눈치를 보는 시대인데 미디어법을 놓고 야당이 방송 장악이라고 몰아치며 있을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TV토론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은 예상보다 다소 공격적이었다. 지난해 9월 국민과의 대화가 ‘조각 실패 논란’ ‘미국산 쇠고기 파동’ ‘불교계와의 갈등’ 등에 대해 자성하는 톤이었다면 이날은 시종일관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정부 정책을 정치 이슈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거부감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반대 여론이 심한 수도권 규제 완화나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는 행정인턴제 등 청년실업 대책에 대해서는 강한 어조로 반박하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집권 첫해의 국정 난맥상에서 벗어나 나름의 자신감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행사를 지켜본 한나라당 의원들은 집권 2년차 ‘MB 드라이브’의 핵심을 ‘탈(脫)정치, 경제 최우선주의’로 요약했다. ‘여의도’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정책을 통해 직접 국민의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얘기다. 경제위기 극복에 집권 2년차 승부수를 띄우면서 4대 강 정비 사업 등 정치적 논란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음에도 ‘그리 서먹서먹한 관계는 아니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MB 발언을 들으면서 여의도 정치에 대한 이해 부족과 무관심·반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평했다. 정치 이슈나 역학관계에 초연하면서 ‘내 방식대로 간다’는 MB식 마이웨이가 본격화될 것이란 분석이다.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의 최근 모습은 집권 초와 비교할 때 포장만 약간 바꿨을 뿐 ‘내 식대로 정책에서 승부를 본다’는 ‘MB식 마이웨이의 2.0 버전’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30%에 가까운 지지율을 꾸준히 유지해 온 데다 최근에는 인기가 급락한 한나라당 지지율을 앞지른 외부적 여건도 자신감 회복의 또 다른 배경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30일 발표된 이달곤 행안부 장관 카드도 당에서 추천하고 발표까지 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한 꺼풀만 들춰 보면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관계자는 “비례대표 의원이긴 하지만 이달곤 후보자는 누가 봐도 교수로 보는 게 옳다”며 “당이 함께 추천한 안상수·김무성·허태열 의원이 아닌 이 후보자가 낙점을 받은 것은 MB의 ‘정치인 디스카운트’가 여전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번 개각을 통해 집권 2년차 권력의 무게중심을 여의도에서 청와대와 정부로 옮겨 국정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이 대통령의 생각이 확고히 드러났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원탁대화에서 자신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비판도 강하게 받아쳤다. “인사에 대한 많은 지적을 다 감안하면 배가 산으로 간다”거나 “옛날에는 장관이 잘못했다고 신문에 나면 그 사람을 내보냈다는데, 옳은 게 아니다”며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야에 입법 마지노선 제시
정치권은 이 대통령이 올해 전방위적 경기부양과 함께 미디어 산업 발전과 교육 개혁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교육 문제에 강한 개혁 드라이브가 걸릴 것이란 예상이다. 이 대통령은 “한국이 다시 한번 성장하려면 교육제도를 바꿔야 한다. 여러 개혁 중 교육을 개혁하겠다는 원칙이 있다. 반드시 하겠다”고 강조했다.

최근 개각에서 ‘교육 개혁 전도사’로 불리는 이주호 전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을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에 임명한 것도 이 같은 해석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교과부는 다음달 초 시·도 교육청과 지역 교육청 단위로 전국 초·중·고생의 학업 성취도 평가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초·중·고생의 학력평가 결과가 지역 교육청 단위로까지 공개되는 것은 처음으로 기존 평준화 체제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자율형 사립고와 기숙형 공립고 확대도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2월 국회의 최대 현안이 될 미디어법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이 문제는 여야가 합의해 산업적 입장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의 과정에서 법안 내용의 미세 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법안 통과 자체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마지노선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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