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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11. 내가 만난 사람-고르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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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민대 평화포럼에 참석한 고르바초프(右)와 필자.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이그나텐코 타스통신 사장이 이 대통령을 안내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다. 이그나텐코는 1988년부터 알고 지낸 절친한 친구다. 고르바초프 대통령 공보비서와 부총리를 거쳐 아직도 타스통신 사장을 하고 있다. 서울에 올 때는 늘 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에 소련 극동연구소장인 프리마코프의 초청장을 받았는데 그 초청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바로 이그나텐코였다. 김 총재가 나에게 전화로 “언제 가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와서 “빨리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을 했다. 김 총재가 가는 도중에 프리마코프가 국회의장이 된 덕분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잘 진행됐다.

크렘린 궁에 이그나텐코를 만나러 갔을 때 고르바초프에게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양분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사람이 고르바초프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나의 관심은 보이콧 전문가인 소련의 선수단을 서울올림픽에 참가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의 출전은 동구권의 참가를 의미했고, 서울올림픽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사마란치도 열심히 뛰었다. 우리 노력이 주효해서 소련은 88년 1월 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고르바초프의 결단이었다.

지난해 논산 한민대가 주최한 평화포럼에 고르바초프를 명예위원장으로 모셨다. 한민대 측에서 고르바초프를 명예위원장으로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을 때 내가 명예부위원장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수락하겠다”고 했단다. 서울에는 손녀까지 데리고 왔다. 평화포럼 오찬 때 “서울올림픽에 소련팀을 보내줘서 동서화합을 이루고 성공한 올림픽을 할 수 있도록 해줘 고맙다”고 했더니 “서울올림픽 덕에 소련과 동구권의 민주화가 앞당겨진 것”이라며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냉전시대 소련의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온화하고 합리적인 지도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시 당을 만들고 정치를 한다는데 올해도 초청해주면 평화포럼에 오겠다고 약속했다.

러시아에서 또 인상 깊은 인물은 소련에서 러시아정교를 부활시킨 알렉시 대주교다. 알렉시 대주교는 고르바초프를 비롯해 옐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언을 하면서 러시아 정치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러시아 대통령들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내가 소련의 서울올림픽 참가를 위해 자주 소련을 방문할 때 알렉시 대주교를 만났다. 그때 대주교는 레닌그라드에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우리 일행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련이 서울올림픽에 참석할 것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줬다. 그리고 ‘노태우’라는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말하면서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하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잠깐 만났지만 훌륭한 인품과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또 한 명의 위인을 잃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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